7월19일 [연중 제16주일]
지혜서 12,13.16-19
로마 8,26-27
마태오 13,24-43
모든 고통을 성장통으로 만들 수 있다면
오늘 복음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는 하늘 나라에 관한 설명입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는 또한 심판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가라지인지 밀인지 빨리 구분해서 가라지 같으면 밀로 돌아오라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제2차대전 때, 헤럴드 레셀이라고 하는 청년이 공수부대원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가 폭탄에 맞아서 두 팔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불구가 된 그는 참으로 낙심하고 좌절하면서 하느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느님,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원망의 기도를 하는 그의 귀에 분명히 들려주셨습니다.
“그래도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지 않으냐?”
레셀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에게는 아직 생명이 있고, 두 눈이 있고, 두 귀가 있고, 두 발이 있습니다. 정말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아직도 많습니다.
생각을 바꾼 그는 의사에게 부탁해서 의수를 만들었습니다.
또 열심히 타이프치는 것을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내온 생활을 잘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것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영화에서는 자기가 직접 조연으로 출연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우리 생애 최고의 해’(The Best Years of Our Lives)이고 그는 1946년도 아카데미상 최우수 조연상을 받았습니다.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체적 조건으로 인하여 절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결연히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 얻은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것을 사용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잃은 것의 열매를 크게 보상해주십니다.
더 많은 가능성이 그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밀과 가라지인지 구별할 수 있느냐면 나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에 대한 나의 자세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러셀은 가라지가 아닌 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경 본문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이해가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구조를 보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중간에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끼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 겨자씨의 비유 – 누룩의 비유 – 밀과 가라지의 비유 설명’의 순서로
구조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샌드위치 구조에서는 그 중간에 끼인 것이 바깥에 감싼 것을 설명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의 보충설명인 것입니다.
겨자씨는 처음엔 작고 볼품없지만, 밭에 심어지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어 쉬게 합니다.
이는 ‘포용력’을 상징합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포용력을 잃어 하와를 배척합니다. 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하느님은 가라지까지 끝까지 당신 밭에 두십니다.
예수님도 유다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 포용력을 배운 이들의 것입니다.
나무가 새를 가리지 않듯, 하늘 나라 백성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양식을 내어줍니다.
에제키엘서를 알았던 유다인들은 그 말씀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에제 17,22-23)
누룩의 비유는 무엇일까요?
누룩은 밀가루 서 말에 들어가 그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누군가를 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삼구’(三仇)입니다.
뱀은 사람 안에서 세속-육신-마귀를 크게 만들어 돈 때문에, 욕망 때문에, 교만 때문에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밀이 밭에서 영양분을 먹으며 포용력을 키우기 위해 하는 일은 바로 삼구를 죽여 복음삼덕을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 나아가 하신 일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당신 품에 안으셨습니다.
그러니 누룩은 우리 삼구를 죽이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밀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든 고난을 자신을 죽이는 도구로 삼습니다.
그래서 겸손해지고 더욱 큰 포용력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고통을 사랑의 성장을 위한 성장통으로 삼는 것입니다.
영화 ‘양철북’(1979)에는 이미 3살 때 누구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하는 오스카라는 아이가 나옵니다.
그는 이웃을 심판하기 위한 양철북을 들면서 성장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때가 가라지일 때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엄마도 죽고 아빠도 죽고 삼촌도 자신 때문에 죽습니다.
그리고는 양철북을 집어 던집니다.
자신도 죄인임을 알았기에 이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때부터 자신 안에 누군가를 쉬게 할 수 있는 밀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성장에 달려있습니다. 포용력의 성장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웃에게 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거부한다면 가라지입니다.
끝까지 고집부린 그 사람의 미래는 참담할 것입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한번은 훌륭한 조각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를 망치와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그 좋은 대리석을 이처럼 많이 깨어버리면 낭비가 아닙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이 깨어져 나갈 때야 비로소 조각은 살아나게 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픔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성장통입니다.
칼 융은 “모든 정신질환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당한 고통이란 포용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세속과 육신과 교만에 대한 욕구가 깎여져야 하는 고통입니다.
성장통을 즐겨 받을 줄 알아야 가라지가 아닌 밀이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 유일하게 ‘고통과 멸시’를 청했습니다.
겸손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밀은 모든 고통을 성장통으로 만듭니다.
그렇게 멈추는 일 없이 성장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고통에 대해 내가 선택한 태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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