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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7-13 조회수 : 655

7월13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이사야 1,10-17
마태오 10,34─11,1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나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삶에는 의미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삶에는 본래 의미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 삶의 의미가 생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삶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찾았다면 삶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이란 영화에는 죽고 싶었던 두 남녀가 살아있어야 하는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강동원 씨가 연기한 사람은 사형수입니다.
강동원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맞아서 눈이 먼 동생과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엄마를 찾아가도 아빠에게 맞으니 그냥 고아원에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고 동생은 길거리에서 얼어 죽게 됩니다.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자궁외임신이라 돈이 급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형과 도둑질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강동원은 애인이 자신을 배신했음을 알고,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살인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나영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14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신은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 오빠는 결혼해서 잘만 살아갑니다.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았더니 엄마는 딸의 탓을 합니다.  
 
사촌 오빠가 밉고 엄마도 미워 3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수녀님인 이모의 소개로 사형수 강동원과의 만남을 이어가며 서로의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이제 살고 싶어집니다.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두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그 삶의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기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면 살아야 할 의미를 잃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신은 존재 자체이시기 때문에 언제부터 존재했느냐고 묻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 이유는 신의 존재와 함께합니다.
존재 이유가 없으면 존재의 의욕을 잃고 그러면 진짜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생존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이유를 모르고 살면 생존이고, 이유를 알고 살면 비로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서로를 위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존재 이유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아주 가끔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겠다는 분을 만납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을 사랑해서 부모님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사랑할 줄을 알아 사랑하는 사람을 많게 만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이들이 컸는데도 부모가 아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살아주기를 바란다면 아이들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까요?
그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주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저절로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려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위해 살면 자살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살면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 가족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을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당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여기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살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영원한 존재이듯, 이 삶의 의미를 찾을 때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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