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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7-06 조회수 : 557

7월6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호세아 2,16.17ㄷ-18.21-22
마태오 9,18-26 
 
하루를 더 살고 싶다면, 내일 왜 살아야 하는지 오늘 써 놓아라! 
 
의미 있게 죽는 것이 나을까요, 의미 없이 사는 게 나을까요?
만약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의미 있게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사느냐입니다.
그리고 그 사는 이유가 있는 곳이 ‘집’이 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병원에 입원하시어 20일 만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집에 가자!”라고 하셨습니다.
집에는 왜 가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집에 가면 하루를 살아도 의미가 있고, 병원에서는 의미를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존보다는 의미입니다. 
 
워싱턴주 올림피아 인근 세인트헬렌스산에 살던 헨리 트루먼 할아버지는 1980년 화산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상황임에도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화산 폭발이 임박하자 정부는 화산 근처 모든 사람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트루먼 할아버지만 끝까지 버텼습니다.  
 
강제로 연행하여 구출할 수도 있었지만, 여론과 할아버지의 연세를 생각하여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화산이 폭발하였고 할아버지는 16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화산재에 묻혔습니다.
할아버지는 말했다고 합니다. 
 
“이 집이 사라지면 어차피 나도 일주일 내로 죽을 것입니다.
나는 이 집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겠습니다.” 
 
[참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책한 민국’, 유튜브] 
 
 
할아버지의 선택이 어리석었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는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 있게 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모든 삶의 의미는 집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의미를 잃고 생존에만 집착하는지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잊고 생존에만 집착할 때 사실 건강도 잃고 죽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의미’입니다.
이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찾아낸 결론이었습니다.  
 
사람은 생존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기적은 살고 싶다는 희망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완벽하기만 했던 26세의 홀리는 결혼 하였고 사랑을 받았고 케이시라는 예쁜 딸을 출산하였습니다.
그런데 3주 뒤부터 손가락부터 시작하여 몸이 서서히 마비되더니 결국, 마비가 전신으로 퍼져 호흡기 없이는 숨도 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녀에게 희귀 난치병인 GBS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온몸이 마비되기는 했지만, 통증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말하는 능력을 잃어가며 “나 너무 아파!”라는 말만 하였습니다.
GBS는 그녀를 서서히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끔찍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딸 케이시는 엄마의 곁을 지켰습니다.
홀리는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딸을 바라보며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바라던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 그게 가장 고통스러웠어요.” 
 
사랑해주어야 할 아기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포기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마비된 지 두 달 되던 날 홀리는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팔을 움직이고 혀를 움직여 딸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는 딸에게 처음으로 우유를 먹였습니다.
70일 뒤 호흡기 없이 자가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재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양손으로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딸을 안아줄 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87일째 되는 날 그녀는 간호사들의 도움으로 두 발로 일어섰습니다.
홀리는 엄청난 투혼으로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고 4달째 되는 날 그녀는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딸 케이시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집은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1년 뒤 엄마, 홀리는 마라톤을 완주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고통이 우리를 끝장낼 건지, 아니면 더 강하게 만들 건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출처: ‘딸아이 출산 후 전신 마비된 26세 엄마가 내린 결단’, 포크포크, 유튜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여인을 치유해 주십니다.
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더라도 12년 동안 앓던 병이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소녀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시면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당연히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지 않을까요?  
 
마치 어린이가 부모님께 ‘학교에서 선생님이 꼭 필요한 걸 사 오라고 했는데 설마 돈 안 주시겠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언가 청하려면 그 청하려는 것이 의미 있다고 믿을 때 강력하게 청할 수 있습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건강이나 생명이라면 그 건강이나 생명이 의미 있을 때 강력하게 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의미는 청할 때 모든 망설임을 이기게 해 줄 힘을 지닙니다.
내일 또 살게 해 주시기를 청하고 싶다면 오늘 저녁에 내일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지
적어놓으십시오.
그러면 내일도 주님께서 더 살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확신을 두고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십니다.
그 확신은 내가 청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오늘을 의미 없게 산다면 내일도 살 수 있게 청하는 것은 자신 안에서 힘을 잃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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