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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6-27 조회수 : 542

비유는 진리에 이르는 사다리다  
 
 
얼마 전 후배 신부님이 상담하고 싶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사제로서 후배 신부가 찾아올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이야기하던 중 강론에 대해서도 말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강론을 잘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화를 써!”라고 말했습니다. 
 
자칫 강론에 예화를 사용하면 수준이 낮은 것처럼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은 세상 모든 것들 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진리가 들어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뜻은 그렇게 비유가 당신 진리로 올라오는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며칠이 지난 뒤 그 신부님이 자신도 비유를 통해 강론하기 시작하였다는 문자를 저에게 보냈습니다. 
저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과 같은 작품을 쓴 위대한 소설가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릴 때부터 유약하고 예민하여 일을 끝까지 해내는 적이 없었습니다. 
사업가인 부모는 대학을 졸업하고 2년이 지나도 취직을 하지 못하는 카프카를 실패자로 낙인찍었습니다. 
 
도시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믿은 카프카는 시골로 내려가 조부와 함께 농사를 짓기로 합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조부는 카프카를 데리고 사과농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사과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첫 번째 사과나무 앞에 서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내가 6년 전에 심었는데 줄기가 부러지더니 가지도 부러져 쓸모없게 되어버렸단다.” 
 
그리고 두 번째 사과나무 앞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나무는 심은 지 1년 뒤에 가지치기를 해 주었지. 
그랬더니 3년 뒤에 맛있는 열매를 맺었는데, 가지치기를 너무 많이 해서인지 작년엔 싹도 트지 않고 말라 죽었어.” 
 
세 번째 나무 앞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나무는 두 번째 나무와 같은 과정을 거쳤는데 끝까지 살아남았어.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쓴 거지. 
이젠 잎도 무성하고 가지도 튼튼해져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단다.” 
 
조부는 이 세 나무를 보여주고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인간도 이 세 사과나무와 같단다. 
어떤 사람은 아무 의욕도 없지. 
처음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그러면서 환경이나 남의 탓만 한단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는 살아. 
그러나 목표가 없어. 
그래서 적당히 열매 맺다가 죽고 말지. 
그러나 네 안에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좋은 열매를 맺을 아주 좋은 것들이 많아. 
그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지. 
그것이 네가 끝까지 건강하고 왕성하게 살 수 있는 길이란다.”
[참조: ‘인생에 한 번은 유대인처럼’, 자오모, 자오레이, 유튜브 ‘책한 민국’]
 
할아버지의 비유를 통한 이 한 번의 교육은 부모가 이십 년 넘게 가르친 것보다 큰 교육이 되었고 
카프카의 삶을 바꾸어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유가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갖는 이유는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음식 안에 보이지 않는 소금의 짠맛이 다 배어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것들 안에는 하느님의 진리가 녹아있습니다.  
 
소금만 먹으면 짜서 감당할 수 없겠지만, 세상 것들과 곁들여 받아들이면 진리의 맛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도 비유로만 설명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한 백인대장에게 예수님께서 이런 엄청난 칭찬을 해 주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도대체 하느님도 알지 못하는 로마 사람이 어떻게 그런 큰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비유를 통해 진리에 다다르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다른 이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의 집으로 찾아와 고쳐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을 묵상하다 보니 예수님께서 굳이 자신의 집에 오시지 않아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무작정 공부만 하는 것보다 비유를 통해 진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지치고 절망하여 더는 버틸 수 없는 큰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유태인들은 이렇게 교육한다고 합니다. 
자녀를 조금 높은 울타리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아끼는 모자를 벗겨 그 울타리 너머로 던집니다.  
 
그러면 자녀는 어떻게 해서든 그 모자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무언가 깨닫습니다. 
 
우리도 자녀에게 많은 옳은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하기보다는, 이런 비유와 체험을 통해 가르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비유’는 진리에 다다르는 사다리이고, 소통의 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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