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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6-24 조회수 : 647

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사야 49,1-6
사도행전 13,22-26
루카 1,57-66.80 
 
<​겸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물론 사랑의 실천이겠지만 그 이전에 가져야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랑은 위선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요한 세례자도 “그분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겸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방향’입니다. 내가 겸손해져 작아질 때 내 등 뒤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 빛보다 어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친구와 함께 집 앞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폭 세 명이 들어와 옆에서 마시게 되었습니다. 
 
처음 조폭이 술 마시는 것을 보았는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일 큰 보스가 중간 보스와 이야기하며 막내에게 술을 따라주었습니다. 
그런데 막내의 술잔이 어디 있는지 보지도 않고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막내는 보스가 술을 어디에 따르든 손을 뻗어서 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포장마차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고 술을 마시고는 다시 잔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먼저 일어나 집으로 나오는데 그 막내가 쫓아 나왔습니다. 
저희가 비웃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인상도 조폭 같았는지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조폭들은 다른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이쪽 조폭들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저 담배 한 대 같이 피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담배를 배우지 않았지만, 저도 조폭인 척 담배를 받아 물었습니다. 
기침이 나왔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참았습니다. 
 
그때 보스가 무슨 일이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키도 크고 몸집도 컸습니다. 
위압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때 막내가 뭐라 변명을 하니 보스가 “찌그러져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사람이 그렇게 찌그러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스는 괜한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당부하고는 우리를 보내주었습니다. 
 
겉만 보면 조폭 두목의 부하는 매우 겸손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하며 누군가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듭니다. 
문제는 조폭 두목을 크게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겉으로만 겸손한 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직장 상사에게 굽신거릴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들에게 겸손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억지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이 뛰어났던 이유는 그가 작아짐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작아짐입니다. 
내가 굽히고 작아짐으로써 내 등 뒤에 있는 누군가를 사람들이 보게 만드는 것이 겸손입니다.  
 
어떤 사람의 겸손 뒤로는 사탄이 보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의 겸손 뒤로는 그리스도가 보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꼭 필요하지만 내가 겸손함으로써 무엇을 드러내는지 살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 뒤로 그리스도께서 보이게 하신 이유는 그가 ‘광야’라는 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두 방향을 향할 수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 혹은 광야나 도시입니다. 
광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즉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가난하게 살며 재물의 욕심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낙타털옷은 옷을 지어 입기 위해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는 뜻은 육신을 절제했다는 뜻이며 마귀를 멀리했다는 뜻은 자신을 낮추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모든 영광이 그리스도께 흘러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육체의 욕구, 혹은 명예욕이 있는 상태로 겸손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도시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보름에 한 번씩 며느리의 가계부를 검사했습니다. 
콩나물과 두부, 연필과 공책값도 철저히 점검했습니다. 
결혼 예복을 50년 동안 입었습니다. 
손자들의 속옷을 기워주는 것이 그녀의 취미였습니다.  
 
그녀의 유언은 “나를 위해 꽃을 장식하지 말라. 그리고 1달러를 황금처럼 아껴라.”였습니다. 
세수한 물로 머리 감고, 머리 감은 물로 세탁하고, 세탁한 물로 걸레 빨고, 걸레 빤 물은 화단에 뿌렸습니다.  
 
‘절제’와 ‘청빈’의 상징인 이 여성의 이름은 프란체스카이고, 한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영부인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가가 어떻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대통령을 더욱 크게 만들어주는 
영부인의 멋진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손길로 인도되던 사람이었고 그 결과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삼구와의 싸움을 통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은 광야입니까, 아니면 도시입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광야로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광야는 내 안의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의 장소입니다. 
이 욕구와의 싸움이 없다면 겸손은 위선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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