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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6-23 조회수 : 660

6월23일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2열왕기 19,9ㄴ-11.14-21.31-35ㄱ.36
마태오 7,6.12-14 
 
​지금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코로나가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저도 영성관을 운영하는 어쩌면 소상공인으로서 얼마나 많으신 분들이 힘들어하실지 아주 조금은 공감이 됩니다.  
 
그런데 더 걱정되는 것은 코로나 이후의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질병으로 주시는 ‘시대적 징표’를 우리가 읽어내지 못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코로나는 어쩌면 더 큰 재앙의 작은 징조일 뿐일 것입니다. 
 
저는 어쨌거나 코로나바이러스의 원인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연을 사랑하지 못한 것 때문에 발생했다고 봅니다.
내가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면 그 누군가도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누군가를 아프게 하며 산 이들이 끝까지 평안을 누린 예는 없습니다.  
 
축구를 하다가 공을 손으로 들고 뛰면 퇴장을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기나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규칙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은 이 사랑의 법과는 반대되는 ‘경쟁’을 가르쳤고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돈이면 남의 마음을 당연히 아프게 해도 된다는 의식이 우리들 안에 참으로 많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유학 가서 공부할 때 맥줏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 우리가 서빙하는 분들을 예의 없게 대해서입니다. 
 
“어이, 아저씨. 맥주 한 잔 더!”
이런 식으로 몇 번 시켰더니 주인이 나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술을 팔지 않겠습니다.
저희 식구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여러분은 이 집에서 술을 마실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럽은 좀 다릅니다.
돈이 좀 있다고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된다고 믿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어떤 신자분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창피함을 느낍니다.
서빙하는 분들을 너무 막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도 누구의 부모님이고 자녀일 수 있는데 반말로 소리 지르고 나무랍니다. 
 
어떤 분들은 아이들이 가게에서 떠들고 사람들이 식사하는 데 방해가 되는데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칩니다. 
 
제가 냉면 배달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남자들의 대부분은 저를 “어이, 철가방!”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돈 내고 내가 냉면을 먹으면 다른 사람을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살기에 왜 이렇게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었는지 잘 압니다.
그 이유는 ‘교육’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나라가 잘되고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라는 목표가 뚜렷합니다.  
 
그러나 경쟁 속에는 타인을 이겨 아프게 해야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이들은 자연이 자신 때문에 얼마나 아파하는지 느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평생을 남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는 것만을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도둑질은 처음 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해서입니다.
다른 아이들의 지우개가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처음 훔친 것은 지우개 하나였습니다.
그때 심장이 터져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서로 협동을 해서 과자도 훔치고 과일 서리도 많이 하였습니다.
점점 안 걸리면 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얼마나 아파할지는
조금씩 무감각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사회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아직 그 물이 많이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념은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을 따르고 있습니다.
홍익인간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이념입니다.
그리고 어떤 나라의 법과 종교도 이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황금률’도 그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러나 이것을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는 경쟁주의 교육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좋은 역할을 했다면, 이젠 함께 공존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BS 어떤 다큐에서 보니,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유치원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나눠 타라고
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각자가 한 바퀴 돌면 다른 아이들에게 그것을 양보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먼저 차지한 아이가 지칠 때까지 타며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즐겼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그 세상에서 재밌게 살려면 그 세상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 법이란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내 마음도 아플 것이라는 ‘황금률’입니다.  
 
지금 우리 교육도 경쟁이 조금씩은 줄어드는 추세이나, 아직은 경쟁주의가 지배적입니다.
전면적인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크게 나아질 수는 없어 보입니다.
이런 시대에서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것을 배우는 교육으로의 전환이 안 이루어진다면, 그 이후의 세상을 보는 것이 지금보다 더 두렵게 될 것입니다.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황금률’을 체득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의 최종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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