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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6-22 조회수 : 556

6월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2열왕기 17,5-8.13-15ㄱ.18
마태오 7,1-5 
 
​자기 얼굴에 묻은 것을 거울에서 떼려고 하지는 않는가?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며 어떻게 이웃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사실 이런 개요, 돼지의 수준의 사람에겐 성체를 줘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 7,6 참조). 
 
그런데 사람이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님을 알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저의 모습은 사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나 신학생 때 사제를 비판했던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사제가 아니었기에 사제를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니 내가 심판했던 사제의 모습으로 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본당 사제들이 성당에서 권위적인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모습의 사제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순간순간 찍은 저의 사진 속에는 교만한 사제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제가 비판했던 사제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에서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깊이 숙이고 90도로 인사하는데, 저는 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악수를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면 제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저도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사제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클러지 셔츠만 입겠다고 다짐했고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도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비판했던 사제들보다 더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옷은 많아서 입지 않는 것이 더 많고, 스마트폰은 최신식이며, 차는 이천cc 중형차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비판했던 사제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까맣게 잊고, 또 내가 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하는 사제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를 심판하던 모습과 같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일은 결국 자신 안의 죄를 감추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죄를 짓지 않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죄의 씨앗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이웃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 안에 아름다움이 있으니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고, 더러움을 아니까 더러운 게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는 이유는 백 퍼센트 내 죄를 합리화하기 위함입니다.
남을 교만하다 심판하면 반드시 그 사람도 교만하고 남을 이기적이라 심판하면 그 사람도 반드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안 그래도 언젠가 그 교만과 이기심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나무를 먹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심판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생명나무인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인간이 예수님이 되지 않는 이상 심판은 저절로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타산지석은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신의 구슬을 가는데 유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내가 이웃에게서 보는 단점은 반드시 내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화가 난다면 그것으로 자신을 바꾸려 해야 합니다. 
 
나의 얼굴에 묻은 것은 털어내려면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이 내 얼굴에 묻은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단점만을 바꾸려 한다면, 이는 마치 자신의 얼굴에 묻은 것을
떼어내려고 계속 거울만 긁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웃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들보’라고 번역된 단어는 건축에 쓰이는 큰 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티’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것들을 잘게 쪼개면 나오는 작은 나뭇가지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들의 눈에서 보이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다 모으면 내 눈의 들보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의 총합은 결국 내 눈에 있는 들보입니다.
남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을 다 모으면 나의 자아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들보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 이웃을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 호흡이 열 번 정도 남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그 호흡으로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이웃에게 단점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거울을 긁지 말고 그 손을 나의 얼굴로 향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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