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3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1열왕기 19,19-21
마태오 5,33-37
자기를 믿는다는 말과 자기를 합리화한다는 말은 동의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가장 믿고 신뢰해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결국,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제가 ‘자기 자신을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결국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임을 우리는 잘 알지는 못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절대로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맹세는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을 때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런 능력으로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씀이십니다.
물론 하늘이나 땅, 그리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자리는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은 하느님만 할 수 있는 부분이지 인간이 할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으니 하느님께 신뢰해야지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믿을 수는 없을까요?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신뢰의 정도는 한정되어 있고 내가 그 신뢰를 나 자신에게 주는 만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제 생각을 지나치게 믿음으로써 결국 진리를 보지 못하여
되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영화 ‘기억의 밤’은 자기 자신만을 굳게 믿는 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재수생인 동생과 모든 것에 완벽한 형은 우애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이사 온 집에서 형은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이 조금씩 형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부모도 조금 이상합니다.
친부모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집을 빠져나와 경찰서로 도망칩니다.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신원조사를 해 보고 거울을 보니 자신은 20대 초반의 재수생이 아니라
이미 40이 넘은 아저씨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형이 꾸민 일이었습니다.
형은 사실 20대 초반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찾다가 결국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범인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범행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모든 것을 20년 전으로 돌려놓고 그 범인이 모든 것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이 과정에서 범인은 조금씩 기억을 찾게 되었던 것이고
결국 자신이 함께 살던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자신은 착한 재수생이기에 범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던 동생은 모든 것을 깨닫고 자살합니다.
범인을 찾아 원수를 갚으면 속이 후련할 것이라 믿어 고생 끝에 범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는 했지만
결국 남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형도 자살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그들의 착각이 처음부터 이 결말로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예화를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한 영화를 너무 모든 것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잘 살았다고 굳게 믿으며 살아온 이들은 악한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될 것이고,
끊임없이 죄인이기에 주님의 자비만 청하며 살았던 이들은 선한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성인이라고 굳게 믿었고, 김수환 주기경은 돌아가시기 직전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 달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믿음도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우리가 힘을 한쪽에 쓰면 다른 쪽에 쓸 힘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자기 자신과 주님도 그렇게 대치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에 신뢰를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나’는 ‘내가 믿는 나’가 아니라 내가 믿는 나를 믿을 것인지, ‘나는 나다’라는 주님을 믿을 것인지 결정하는 ‘나’입니다.
이렇듯 ‘참 나’와 ‘자아’, 그리고 ‘주님’이 구별될 때 비로소 자아에만 신뢰를 주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와 주님 사이에서 나의 신뢰를 어느 쪽에 줄 수 있는지 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주님을 믿어도 결국 자아가 만들어낸 우상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100%의 신뢰를 자아에게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켈리 맥고니걸’의 「움직임의 힘」이란 책에
헤펠이란 운동을 아주 싫어했던 한 여인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녀는 여자는 달리기하면 안 된다는 철저한 믿음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50년 동안 뚱뚱하게 살아온 자신을 합리화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라고 왜 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믿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마라톤을 완주하게 됩니다.
건강해진 것은 이루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믿으며 크고 작은 이러한 착각 속에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삽니다.
여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나 자신을 믿는 나의 믿음에 의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한 번쯤은 믿고 실천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나의 신뢰는 나 자신에게서 조금씩 주님께로 옮겨가게 되고 그만큼 하느님 자녀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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