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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6-08 조회수 : 530

6월8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1열왕기 17,1-6
마태오 5,1-12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나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에 어떤 청년과 대화하던 중 제가 조금 당황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행복하려면 이래 저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청년은 자신은 행복이 인생의 첫 번째 가치나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다섯 번째라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최고 가치가 행복이었고 그것이 바뀐 적이 없었기에 그런 반응은 저를 당황하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행복이 인생의 첫 번째 가치가 아니라면 우리는 자아의 욕구에 속아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자녀의 성공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면 나는 그 가치를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도 그런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행복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행복을 허락해도 되고 어쩌면 나의 행복이 나를 만들어주신 분께 가장 효도하는 길일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행복해지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해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가난”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저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저를 찾으며 몇 시간을 돌아다니셨습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저를 발견하셨는데 제가 트럭들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흙장난하며 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엄마를 찾겠다고,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찾아다녔다면 그 하루 동안의 행복은 날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저를 찾지 못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멀리 안 가고 주위에서 놀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저를 데려가지 않고 어머니가 저를 찾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찾아오셨다면 주님은 항상 제 곁에 계시고 저희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입니다. 
 
어렸을 때는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가난한 행복은 잊고 대학에 들어가야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생겼습니다.  
 
저의 책상 앞에는 “나는 공부하는 기계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계로 지내고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행복하여지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지옥 같은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대학에 갔더니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취업 걱정해야 했습니다.
취업하면 행복할까요? 그 나름대로 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결혼도 해야 하고 직장에서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행복해지려면 끝이 없습니다.
이런 삶의 형태가 마음이 부자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부자는 많이 가졌지만, 더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마치 어린이처럼 부모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 마구간은 겉보기에는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마구간 자체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더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안에 머무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행복이십니다.
예수님이 머무는 마음이 행복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의 여관들은 마음이 부자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이미 가진 것이 풍족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가난해 보이는 부부는 맞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이 많을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영영 참 행복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찾는 헤로데에게 자녀들이 다 참혹하게 죽는 비극을 맞습니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네 잎 클로버에 얽힌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네 잎 클로버를 따려고 허리를 굽힌 순간 포탄이 지나가서 목숨을 건지게 되어
‘행운’이라는 꽃말을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흔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입니다.  
 
우리는 행운이라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하여 행복이라는 세 잎 클로버를 짓밟고 다닐 수 있습니다. 
 
누군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은 짓밟으며 ‘미래’의 행운을 발견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부자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발밑에 이미 행복할 조건이 깔려있음을 알고 행운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런 사람의 것입니다. 
 
결국, 네 잎 클로버도 행복해지자고 찾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이 발밑에 있는데 뭐하러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고 할까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내 발밑에 그분이 항상 깔려있음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행복을 허락합시다.
내가 행복하면 그분은 행복하게 머무는 나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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