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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6-02 조회수 : 637

6월2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베드로 2서 3,12-15ㄱ.17-18
마르코 12,13-17 
 
부족한 것이 많을수록 사기당할 확률도 높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것으로 올가미를 씌우려고 시도합니다.
로마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세상도 우리를 미혹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이용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기당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가 보좌 신부 때 사기를 당해 물건을 엄청나게 산 일이 있습니다.
추석 즈음에 한 백화점에서 영화를 보고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냉동탑차가 도로에서 제 차 옆으로 오더니 잠깐만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길가에 세웠더니 자신들도 그 백화점에 납품하는 사람들인데
물건이 남아서 싸게 팔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내어놓은 물건은 제주 옥돔이었습니다.
얼음 위에 재워진 옥돔은 정말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백화점에서는 35만 원에 판매되는 것인데 4만 원에 사라고 했습니다.
자신들도 고향에 내려가고 싶지만 바빠서 내려갈 수 없어서 그렇게 남은 것들을 팔아
소주라도 한잔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어차피 고향에 내려가면 여러 가정에 선물을 해야 해서 10박스를 샀습니다.
수녀원에도 주었는데 수녀님들이 옥돔은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집에 가져갔더니 온통 얼음으로만 채워져 있고 위에 3마리 정도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몇 마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20마리 정도 있다고 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사제가 사기 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당해버렸다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 저는 돈이 넉넉하지 못한 보좌 때였기 때문에 사기를 더 당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일단 그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애정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욕구가 더 크니까 그만큼 싸게 판다는 것에 대해 더 혹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싸게 사기 위해 사기의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100원짜리라도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굳이 싸다고 돈을 쓰지 않습니다.  
 
돈이 더 넉넉해졌는데도 사기당할 위험이 그만큼 줄어든 것입니다.
무엇이 넉넉할 때 덜 미혹됩니다.
친구가 많을 때 애정에 덜 미혹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기꾼들은 그 사람의 욕구를 자극합니다.
만약 전화금융사기를 치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녀가 다쳤다고 해서
당황하게 만듭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야 당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민감한 것이 많은 이들은 많은 사기를 당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믿고 보증을 서주거나 돈을 빌려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본인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인간 애정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사기를 쉽게 당하는 것뿐입니다.  
 
재물이든 사람에 대한 애정이든 자신이 민감한 부분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기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리고 민감해지지 않는 방법은 넉넉하게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만약 세금을 내라고 하면 유다인들에게 매국노처럼 취급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지 말라고 하면 반란세력으로 잡혀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이란 세상의 욕구입니다.
세상의 욕구는 세상에 돌려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나의 모든 바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바라기 위한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세상 것을 욕망할수록 하느님 것을 덜 욕망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 것을 욕망할수록 세상 것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에너지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에 사용하기 때문에 세상 것에는 무관심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쪽 편을 들어주셔서가 아니라 하느님 편을 들으셔서 그들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면 부족한 것이 없어집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와 있을 때 아이들이 세상 어떠한 유혹에도 미혹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보는 것을 귀찮아해서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맡기면 아이는 어머니의 관심을 못 받는 대신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스마트폰을 보여주면 그 아이는 엄마를 버리고 그 스마트폰을 내미는 모르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지면 자녀들은 그렇게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에 미혹되어
사기당하고 이용당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엄마의 사랑만을 믿는 아이라면 자신을 엄마의 사랑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고 겁을 먹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부터 미혹되는 일이 없는데 그것들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라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기당하지도 않고 이용당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는 길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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