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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5-23 조회수 : 560

5월23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18,23-28
요한 16,23ㄴ-28 
 
​중간을 배제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우물물을 길어 저기 밑 빠진 독에 가득히 채우시오.”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 생각하면서 밤을 낮 삼아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결국, 우물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임금님, 용서하소서.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겠다고 우물이 바닥나도록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그 금덩이는 그렇게 순종하는 신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오.” 
 
임금이 한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상태에서 임금에게서 오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자신의 말을 잘 따라주는 이에게 복을 줄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외시키고 아버지께 은총을 받는 것이 가능할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돈벌레라고 불리는 그리마가 또 한 마리 집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징그러워서 휴지로 집어 변기통에 내렸는데,
이것이 해충을 잡아먹는 좋은 벌레라고 하기에 그다음부터는 고이 잡아 창문 밖으로
놓아주었습니다.
돈벌레란 이름도 한몫을 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엔 책 표지 위에 그놈이 올라오게 만들어서 밖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몸집이 큰 놈이라 귀찮아서 손으로 집어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돈벌레는 저에게 잡힌 자신의 다리들을 자르고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손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다리 몇 개 잃은 벌레를 책표지 위에 얹어서 내보내 주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인간의 관계는 마치 사람과 돈벌레와 같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너무 이해할 수 없어서 책 표지 위에 올라오는 조금의 부자유스러움도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조금이나마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이용한 책 표지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며 아버지께 청을 드려 무엇을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무엇이든 아버지께 청하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이 대신 청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우리가 직접 청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름’은 ‘본성’을 말합니다. 본성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면서 아버지께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상태에서 아버지께 청하면 예수님은 소외당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보화를 얻게 됩니다.
그 보화가 성령이십니다. 
 
본당 신부를 잠깐 하며 보았더니 본당에서 수녀님의 위치가 매우 애매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자의 생각이 옳다고 하여도 그것을 들어주면 수녀님 처지가 난처해지는 청이라면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신부님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울상이 되어 돌아갑니다. 
 
이런 일들은 본당 신자들과 주교님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본당에 발령받아 온 사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임기도 안 끝났는데 바꿔 달라고 투서를 하면
주교님으로서는 난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조금 나은 신부님이 새로 부임할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주교님과 그 이전 신부님과의 사이를 안 좋게 만든 본당으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내와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자녀의 청을 모두 들어주겠습니까?
이는 마치 죄를 용서해주라고 교회를 파견하였는데 교회는 소외시키고 직접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받겠다고 성당에 나와 고해성사를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파견한 이를 먼저 소외시키지 않는 한에서 주님께 무엇을 청해야 합니다.
그 청하는 것이 중간에 있는 이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것이고 그러면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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