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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5-22 조회수 : 615

사도행전 18,9-18
요한 16,20-23ㄱ 
 
​주님의 시선에만 근심하기로 결심해야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경북 대구의 근교에 ‘지산교회’라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 재정적으로 한몫을 담당하던 ‘오 부자’가 있었습니다.  
 
성이 오씨가 되어 오 부자라고 지칭되는 것이 아니라 5형제가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는 집안으로, 모두가 부자이기 때문에 일괄하여 오부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 오 부자가 사업 관계상 지산을 떠나 대구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오 부자가 한꺼번에 이사하게 되자 지산교회의 재직들은 적잖게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교회를 꾸려 갈 수 없다고 생각한 재직들은 대구로 선교사 안두화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선교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재정적으로 지원을 좀 받아 볼까 하는 약삭빠른 속셈에서였습니다.
그들은 선교사 앞에 앉아서 한숨만 푹푹 내 쉬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안 목사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왜들 그러십니까? 교회에 무슨 걱정되는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이때로구나 하고 “예, 목사님! 아 우리 교회의 오 부자가 글쎄 한꺼번에 이사하였지 뭡니까? 그러니 우리 교회의 유지가 문제입니다.” 라고 눈치를 보아 가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안 선교사는 “그래요? 그것참 문제로군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이 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재직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니 또 무슨 걱정이 생겼다는 말인가?’  
 
그들은 놀라서 안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왜요? 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자 안 목사는 조용히 웃으면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요. 문제지요.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지산교회의 여러분들은 주님은 믿지 않고 오 부자만 믿고 계시니 그게 어떻게 문제가 아닙니까?” 
 
삶이 기쁘지 않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이 ‘근심’입니다.
근심은 누구를 믿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도 실제로는 나 자신과 나 자신이 믿는 것을 믿으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곧 ‘근심’과 연결됩니다.
자신을 믿어도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근심하고, 하느님을 믿어도 근심할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근심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에 두 근심이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계속 ‘성령의 오심’과 연결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인데, 어떻게 그 기쁨을 주시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상반된 ‘근심’과 그에 따른 ‘기쁨’에 의해 언급하십니다.
세상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근심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더는 보이지 않으시면 세상은 기뻐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세상이 기뻐할 때 근심에 쌓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면 세상은 근심에 쌓이지만, 제자들은 기뻐합니다. 
 
이렇듯 세상에 속한 사람의 근심과 주님께 속한 사람의 근심은 반대입니다.
하나가 기뻐할 때 다른 것은 근심하고, 하나가 근심할 때 다른 것은 기뻐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 근심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으면 세상 것 때문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것 때문에 근심하면 주님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누구나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압니다.
그러면 주님 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빈센트 빌 박사가 거리를 걷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매우 괴로운 표정을 하며 인사를 합니다. 
 
빌박사 : “자네 무슨 근심이 있나? 왜 그렇게 죽을상이 되어있나?”
젊은이 : “말씀 마십시오, 요즘은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하나가 지나면 또 하나가 꼬리를 무니 견딜 수가 없군요.
빌박사님 어디 근심 걱정이 없는 곳이 없을까요?” 
 
빌박사 : “있지. 딱 한 군데가 있지.”
젊은이 : “그곳이 어딘데요?”
빌박사 : “왜, 그곳에 가겠나?”
젊은이 : “가고말고요. 그런 곳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가죠.” 
 
빌박사 : “그래? 그럼 설명하지, 공동묘지라네.
그곳에 누워있으면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이 없지.”
젊은이 : “그럼 나더러 죽으란 말씀인가요?”
빌박사 : “그런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네.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보다는 오늘 만나게 될 그분 때문에 더 근심하게 될 걸세.
오직 그 방법을 통해서만 자네가 하는 근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 
 
우리는 누구 때문에 근심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잘살고 있는지 알고 싶거든 지금 그리스도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고 느껴보십시오.
그분이 미소짓고 있다면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시선을 바라보고 눈을 맞추는 이에게만 당신이 준비한 기쁨의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신랑이 자신의 아기를 낳아준 여인에게 돈을 벌어 가져다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인은 아기를 낳아야 해서 근심하지만,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주님 때문에 근심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주님의 시선 때문에 지금 당장은 근심스럽더라도, 그 열매 때문에 주어지는 성령으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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