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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5-21 조회수 : 613

5월21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18,1-8
요한 16,16-20 
 
​관계는 쉼 없는 진동이다 
 
자녀에게 컴퓨터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하다가 살해를 당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자신도 스스로 자살을 하였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하다가 성적이 떨어져 두려워하는 아이에게 오히려 살해를 당했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관계를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별거나 이혼한 사이였습니다.  
 
부부관계를 잘 유지할 능력이 없다면 자녀도 사랑할 능력을 잃게 됩니다.
물론 어머니가 시간상으로 자녀와 있을 시간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면 자녀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흐르는 본성이 있는데, 사랑은 마치 물처럼 위에서 흘러내려 옵니다.
아내가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다면 둘의 사이에서 발생해야 하는 사랑이 고갈되기 때문에 자녀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녀와 함께 있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사랑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자녀들은 폭력을 당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게 되면 결국 보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빠가 직장에 출근하는데 아이가 떼를 쓰고 붙든다고 해서 출근하지 않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자녀와 떨어져 밖에 나가 일해야 아이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조금 성숙해진다면 아빠가 자신을 떠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한 것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아빠는 규칙적으로 다시 자신을 만나러 올 것을 알고 아빠가 떠나는 것을 크게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약한 상태에서 어른이 되면 상대가 자신을 떠날 것 같은 두려움에 연애도 제대로 못 하게 됩니다.
모든 관계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임을 깨달아야, 집착이 아닌 참다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인간관계가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 되는 이유는 ‘사랑의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이 되시려면 그 중간을 오가는 성령께서 계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아버지나 아드님께만 머무시며 끊임없는 진동의 운동을 하지 않으시면
삼위일체는 깨지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사랑이 아니시게 됩니다.  
 
이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자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 자녀에게도 유익한 것과 같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자녀만을 생각하며 남편을 외면한다면 남편은 사랑받지 못하는 가정에
돈을 벌어 가져다주는 것이 이용당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점점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가정이 깨지게 됩니다.  
 
남편의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하느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을 시간을 내지 못하면 가정을 자기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또는 당신의 승천과 성령강림을 통한 함께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조금 있으면” 때문에 혼란스러워합니다.
아버지와 교회 사이에서 마치 어머니처럼 오가며 진동하는 역할을 해야 하심을
아직은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엄마를 보지 못할 때와 다시 볼 때의 감정의 변화가 없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이런 진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규칙적으로 성당에서 미사를 통해 힘을 얻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을 줄 수 있는 분에게 가는 것은 분명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 얻은 성령을 자녀에게 다시 주는 것은 더 큰 기쁨이 됩니다. 
 
한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가난했습니다.
복장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노인의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도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라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어요.” 
 
이 할머니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항상 행복한 기분이 들어서가 아니라, 지금 힘들어도 사흘 뒤에 또 행복해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지금의 십자가를 잘 질 수 있어서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지금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도 곧 다시 오셔서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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