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17,15.22─18,1
요한 16,12-15
성령은 온유와 겸손을 타고 흐른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는 군대의 모습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말년 병장 유태정은 선임과 후임들에게 신망이 높은 군인입니다.
그런데 이승영이란 명문대 출신 신병이 들어옵니다.
그는 이등병임에도 군대의 부조리한 면을 뜯어고치겠다고 선배에게 대들고 사고를 칩니다.
태정은 자신이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끝까지 친구를 감쌉니다.
그런데도 승영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친구가 걱정되면서도 태정은 제대합니다.
승영이 어느 정도 선임이 되자 부조리하다고 여겼던 군 생활에 아주 잘 적응합니다.
선임에게는 아첨을 떨면서 후임도 최대한 잘 대해주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윤종빈이란 신병이 자신의 부사수로 들어옵니다.
그도 어리바리하고 사고뭉치입니다.
승영이 그를 잘 대해주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사고는 늘어만 갑니다.
종빈 때문에 선임들에게 계속 욕을 먹어가며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릅니다.
그런데 종빈이 여자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게 된 후로 병영에서 걸어가며 담배를 피웁니다.
군대에서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승영은 자신이 후임 때문에 더는 피해를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마음먹고 그를 야단칩니다.
믿을 사람이 유일하게 사수뿐이었던 그는 자살을 선택합니다.
죄책감을 느낀 승영이 자신의 사수였던 친구 태정을 찾아갑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님을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태정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계속 “내 탓이 아니다.”,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승영의 태도에 태정도 짜증을 냅니다.
태정이 미안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승영도 자살하고 난 뒤였습니다.
오랜 시간 사귀었어도 여전히 남남 같은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잠깐 만나고도 친근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친교는 사랑이 흘러야 합니다. 사랑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흐르지 않는 친교는 친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서만 참다운 친교와 인간관계가 맺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성령을 어떻게 흐르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군대 문화’에서는 사랑이 흐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선임 후임이 즐겁게 다시 만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때 함께 지내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이 손해를 입는 상황이 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화를 내고 심지어는 구타까지 하는 일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화를 내고 갈구며 때리기까지 한 사람과 이후에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령을 교회에 흘려보내 주시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선 당신과 사도들 사이에 성령의 중개가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친교를 맺게 해 주시는 주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본성은 ‘겸손’입니다.
같은 하느님 가운데서 가장 겸손하신 분을 찾으라면 성령님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세 분 다 완전하신 분이시지만).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자는 아버지께 순종하시지만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드님께 순종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겸손하신 분이 교만한 사람을 통해 흐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당신 마음을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군대 문화 안에서는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통해 흐릅니다.
이탈리아 ‘폼페이’라고 하는 곳은 2,000년 전에 매우 번성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여 화산재로 오랜 기간 덮여 있다가 최근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입니다.
그 오래전에 이 도시엔 이미 수도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도관을 잇는 곳은 납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
납중독을 모르던 때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도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40살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께서 세상 끝까지 흐르십니다.
성령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따라 흐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가리옷 유다처럼 자신이 흘려보내야 하는 성령을 통해 이웃을 납중독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또한, 전혀 변하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이웃들 앞에서 온유함과 겸손함을 잃어갈 때 그런 납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만약 그렇게 끝나버린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도 외로울 것이고 영원히 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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