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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5-09 조회수 : 567

5월9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13,44-52
요한 14,7-14 
 
모든 신앙인은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봉성체를 다니면 정말 예수님을 맞으시는 분들의 얼굴이 천차만별입니다. 
대부분은 천사와 같은 얼굴로 사제를 맞이합니다.  
 
참으로 기억에 남는 한 할머니가 계셨는데 얼굴이 말 그대로 천사였습니다. 
봉성체가 끝나면 이불 밑에서 몇만원이 돈 봉투를 꺼내서 꼭 저에게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 연세에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고우신지 저도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그렇게 평했습니다. 
 
그런데 한 요양병원에서 어떤 분에게 성체를 영해 주려고 한 적이 있는데 그분은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얼굴이 마치 마귀와 같았습니다. 
심지어 치아도 육식동물처럼 뾰족해져 있었고 눈은 흰자가 많이 보였으며 입에서는 끊임없이 욕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몸은 사람들에 의해 침대에 묶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온전한 의식이 없다고 판단하여 성체를 영해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의식도 있는 사람이고 봉성체를 기다렸다고 하기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예식을 진행하고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성체를 뱉어버렸고 침이 묻어 녹아내리는 성체를 제가 영해야 했습니다. 
그런 저를 향해서 계속 끊임없이 욕설을 해 댔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과는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외모까지도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유튜브에 지금 올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삼위일체는 한 분 안으로 다른 분이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하나가 되는 친교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오신 분이 그 받아들인 이의 주인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받아들인 이는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신 안의 보이지 않는 주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과 행동이 바뀝니다. 
결국, 외모까지도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 계신 분의 능력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인간들에게 삼위일체를 계시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아버지를 당신 안에 모시고 그 이후부터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제 당신 뜻대로 살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셔서 아버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자동차 운전자의 성격을 알려면 그 차가 어떻게 달리는지 밖에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을 보면 그분 안에 계신 아버지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당신도 한 몸을 이루는 삼위일체이니 우리가 당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사시면 우리는 이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표징입니다. 
물론 표징이나 이적도 일으키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고 결국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이라 할 수 있게 됩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을 잘 아실 것입니다. 
어니스트는 그 마을의 매우 온화한 인간의 얼굴 모습을 닮은 큰 바위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얼굴을 닮은 사람이 그 마을에 나타날 것이란 예언도 믿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그런 얼굴을 닮은 사람을 찾았습니다. 
자신이 그 얼굴로 변해가고 있음을 잊은 채로.  
 
한 시인이 늙고 주름졌지만 온화하고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한 죽음이 임박한 
어니스트를 보며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 씨야말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어니스트를 쳐다보았고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가면서 분명히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지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큰 바위 얼굴은 어니스트의 주인이 되었고 그렇게 그를 변화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나 자신은 절대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였다고 믿을 때 누군가로부터 그분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가면 안에 숨겨진 참 우리 자신이 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모든 신앙인은 “나를 본 것이 곧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 친교의 목적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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