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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4-27 조회수 : 614

4월 27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6,8-15
요한 6,22-2 
 
​믿음이 양식이다 
 
방관자효과(bystander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라고도 하고 구경꾼 효과라고도 말합니다.  
 
1964년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s)라는 여인이 뉴욕의 자기 집 근처에서 새벽 3시 30분경 30분 동안 반항하며 강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집 주변의 40가구에서 그 소리를 들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구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라테인(Latane)과 로빈(Robin)이라는 심리학자가 이와 관련된 실험을 했습니다.
대학생들을 실험 명목으로 불러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방을 여럿 나누어서, 어떤 사람들은 혼자 있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럿이 같이 있게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문틈으로 연기가 새어들게 했습니다.  
 
혼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75%가 2분 이내에 알렸고, 여럿이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6분 이내에 불과 13%만 알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럿이 있으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책임감의 분산’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런 방관자 효과, 혹은 책임감 분산이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아니어도 돼!’라는 생각이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01년 일본 신오쿠역 퇴근길로 인파가 가득 찬 지하철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이수현 신도롬’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바쳤는데 자신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4명이 구했고, 6명, 9명이 뛰어내려 구했다는 기사가 수도 없이 나왔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무기력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일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 저 사람과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등의 생각에 빠집니다.  
 
이렇게 무기력증에 빠지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소라면 일을 시키는 주인 앞에서 무기력증에 빠질 수 없습니다. 
 
제가 무기력증에 시달릴 때는 대학을 계속 다녀야 하는가, 아니면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가 고민할 때였습니다.
그 1년이 가장 힘들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사제가 되기로 하고 주님께서 불러주셨음을 믿게 되니까 다시 힘이 났습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의 주인공은 3살 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아버지가 있지만,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 자신을 낳은 것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그는 이도 저도 싫어서 사다리에서 떨어져 스스로 자라는 것을 멈추고 그저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런 무기력감으로 가족들에게 주는 것은 피해밖에 없었습니다. 
 
카인은 “내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입니까?”라고 하느님께 대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너희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고통받은 이웃의 방관자가 되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의 혼란은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헛갈리는 데서 옵니다.
부모가 명확해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압니다.
밥만 먹어서는 힘이 나지 않습니다.
밥을 주는 이가 부모임을 믿어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고 힘도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명확히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주는 것들은 이제 ‘표징’이 됩니다. 
 
따라서 인생을 힘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에너지를 아버지의 사랑을 믿으려고 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 믿음만이 살아갈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만 얻으려며 살다가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그러면 그런 양식들에 파묻혀
무기력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믿는 데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나의 삶의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겉으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 젊고 예쁘고 돈 많고 명예 있는 이들이
자살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들은 모든 에너지를 육적인 양식을 얻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결말을 맞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육적 양식과 영적 양식을 대비시키며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당신을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아서가 아니라 배를 채웠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구하지 말고 표징을 통해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양식을 먹는 이유는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양식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증가하면 정체성이 확고해지고 그러면 삶의 의욕도 증가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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