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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4-26 조회수 : 564

4월 26일 [부활 제3주일] 
 
사도행전 2,14.22ㄴ-33
베드로 1서 1,17-21
루카 24,13-35 
 
성경공부는 스승이 전부다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버스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흰 터번을 두른 시크교인 차장이 할머니를 부축하여 빈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시선은 차장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버스가 몇 정거장을 지나자 할머니는 내릴 때가 되었고 차장이 다시 할머니를 부축해 드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할머니는 차장에게 인사하며 안쓰럽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얼마나 아플꼬. 그 머리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구려!” 
 
어쩔 수 없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믿는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외도한다고 믿어버리면 모든 것이 그 증거로 보입니다. 
그러니 부활한 예수님도 믿어야만 보고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나요? 어디서 예수님을 보셨나요? 
바로 성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매일 만납니다. 
그런데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아직 부활의 기쁨을 충만히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성체가 예수님임을 미사 때마다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느냐고 물으면 
만나지 못했다고 대답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알 뿐, 믿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교리가 완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려면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오늘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도 이미 여인들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뒤였습니다. 
알기는 해도 만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두 제자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해 줄 수 없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성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나요? 
바로 ‘성경공부’를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 성경 말씀을 설명해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만큼 당신 부활에 대한 확신을 지닌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만큼 성경을 통해 부활의 확신을 그들에게 심어줄 스승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열심히 공부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공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살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하시는 성경 말씀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였습니다. 
그것 자체가 예수님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그것과 함께하신다는 ‘공재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프로테스탄트들은 그것이 이전에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반발합니다.  
 
이에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양대산맥은 스위스의 츠빙글리는 예수님께서 “기념하라!”라고 하신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냥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하면 된다는
‘기념설’을 주장합니다.  
 
성만찬을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에서 벗어나 그저 하나의 상징물에 불과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에 둘을 합의시키려 노력한 인물이 칼뱅입니다. 
그는 “이는 내 살이다.”에서 “이다”에 집중하였습니다.  
 
현재형이기 때문에 현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영적 임재설’이라고 말하며 둘의 중간에서 이 예식을 기념할 때 역사의 예수님께서 현재에도 영적으로 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경만으로’라는 기치로 가톨릭교회를 나온 대표적인 소위 세 개혁자들도 처음부터 성경해석에서 차이를 보이고 대립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성경을 해석할 만큼 완전히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이 스승이 된다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성체가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해석하기는 하지만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는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뜨거워진 가슴으로 성찬례 때 진정으로 당신을 
알아보게 하시고 당신을 만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빵을 떼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찬례 때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지 못하는 성경공부는 빗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빗나간 스승으로부터 성경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제 나라의 환공이 어느 날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윤편이 당하에서 수레바퀴를 깎아 만들고 있다가 몽니와 끌을 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습니다. 
 
“한마디 묻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으시는 건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했습니다.
“성인의 말씀이지.” 
 
“성인이 지금 살아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습니다.
“벌써 돌아가셨다네.” 
 
“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벌컥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어찌 바퀴를 만들고 있는 목수 따위가 시비를 건단 말이냐?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 
 
윤편은 대답했습니다.
“제 일의 경험으로 보건대, 수레바퀴 만들 때 너무 깎으면 깎은 구멍에 바큇살을 꽂기에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다는 일은 손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제게서 이어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인 이 나이에도 늘그막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도 그 전해 줄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장자의 ‘수레바퀴 깎는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운 진리가 글 안에 다 담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글을 쓰신 분이 살아계셔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때야만 그것이 죽은 자의 찌꺼기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로 성경공부도 스승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실 때 그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그분을 만나 뵙게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 살아계십니다.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할 때 왜 당신을 박해하느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예수님의 교회와 함께하지 않고 교회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 죽은 책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보다 그 성경을 해석해주는 참 스승인 교회를 올바로 찾아야만 합니다. 
그 성경해석자는 분명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성경해석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해석을 통해 성체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끌어주는 스승이 곧 그리스도를 닮은 성경해석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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