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2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5,17-26
요한 3,16-21
절실해야 구원자다
1912년 4월 14일, 세계 최대의 해난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1만 6천 톤의 거대한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22노트의 속력으로 북대서양을 항해 중
빙산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 배에는 구명대가 승객수의 반 밖에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자는 무려 1,517명이나 되었습니다.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인 죠 하퍼씨는 시카고의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바다 위에 떠서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전하는 비장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물 위에 떠 있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면서 그는 같은 형편인 한 젊은이에게로 헤엄쳐 갔습니다.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아니요!”
파도가 두 사람을 떼어놓았습니다.
수 분 후에 다시 그들이 조금 가까워졌습니다.
하퍼씨가 좀 큰 소리로 또 물었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였나?”
“아직 못 했습니다.”
이때 큰 파도가 하퍼씨를 삼켜 버렸습니다.
그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구원받았나?” 하는 음성은 파도 소리에 실려 계속 젊은이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에, 그 젊은이는 뉴욕의 한 교회에서 신앙 체험담을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죤 하퍼씨가 구원한 마지막 사람입니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순간에도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마지막 에너지를 사용한 존 하퍼씨는 무엇이 그렇게 절실했던 것일까요?
그에게는 자신과 이웃의 구원이 마지막 숨보다 더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런 절실함이 없다면 구원은 의미를 잃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잠깐이나마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께 무언가라도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오히려 내가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을 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성체조배를 열심히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라죽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점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심장을 쥐어짜는 불안함이 자주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안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성체조배를 한 시간 정도 하고 나면 그 불안함이 잠깐은 사라졌습니다.
불안할 이유가 없는데 불안하니 더 불안해졌습니다.
몇 달, 몇 년을 그런 상태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차리라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제 심장이 예수님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제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절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두 달 이상을 성체를 영하거나 기도를 하지 못하는데도 이전과 차이가 없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아직은 완전하게 구원자가 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구원자는 생명을 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절벽에서 나뭇가지 하나 잡고 있다면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해 끝까지 그 나무를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절실하지 않다면 그분은 아직 나의 구원자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원죄의 영향으로 태어나 구원에서 제외된 상태였습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란 뜻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일어나는데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밝은 빛으로 그 빛이 절실한 오징어들이 올라와 잡히듯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들만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그분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아직 나에게 구원자가 아닙니다.
‘겨울왕국 2’에서 안나가 동굴에 갇혀서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올라프가 동굴을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가리켜도 큰 의욕이 없습니다.
그냥 동굴에 주저앉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 발씩 그 빛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동굴을 빠져나옵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그런 빛이어야 합니다.
내가 한 발짝 걸을 힘만 남아있다면 그 방향이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무엇이 밟히는지도 모르는 캄캄한 굴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한 달을 굶은 사람이 음식을 바라는 것처럼, 사막에서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이 오아시스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물속에서 숨을 못 쉰 사람이 찾는 공기처럼, 그렇게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면 비로소 그분의 이름을 믿은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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