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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4-07 조회수 : 615

4월 7일 [성주간 화요일] 
 
이사야 49,1-6
요한 13,21ㄴ-33.36-38 
 
신앙도 속도보다 방향이다 
 
속도보다 방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산인 줄 알고 열심히 올랐는데, “저 산이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가만히 있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방향을 잃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저희 교구 유학생들은 한곳에 모여 성탄절과 새해를 함께 지냅니다.
한 번은 독일에 모여 스키를 탄 적이 있습니다.
리프트를 타고 오르고 또 오르니 정상이 나왔습니다.
정상에 올라가니 그곳은 오스트리아였습니다.
워낙 스키장이 큰 것입니다.  
 
즐겁게 놀다 보니 리프트 시간이 다 되어 마지막으로 내려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스키를 잘 탈 줄 몰랐던 로마에서 온 우리는 조심조심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먼저 내려가신 어떤 신부님이 끝까지 다 내려와서 잠깐 길을 잘못 든 것입니다.
리프트로 다시 올라올 수 없어서 그분은 끝까지 내려갔습니다.  
 
나중에 한 명이 사라진 것을 알고 전화로 통화하여 그분을 모셔왔습니다.
마지막 잠깐 길을 잘못 들었는데 차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가 계셨던 것입니다.
정말 속도가 10이 중요하다면 방향은 90이라 할 것입니다. 
 
저도 대학 때 친구와 지하철을 거꾸로 탄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시골 사람이라 전철을 많이 타보지 않아서 지하철 지도를 잘 볼 줄 몰랐습니다.
친구가 당연히 지하철을 잘 탔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방송이 나오는 것을 몇 번 듣더니,
“아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황급하게 다음 역에서 뛰어내려야 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는 더블린에서 개최되는 대영 학술협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탔는데 연착하여 더블린에 도착했습니다.
회의 시간이 매우 촉박했습니다.
그래서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마차를 타고 마부에게 “빨리 달려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중 헉슬리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은 것을 기억하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마부는 “모르겠는데요? 그냥 시키신 대로 빨리 달리고만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신앙은 하나의 여정입니다. 어디서 출발하여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모르는 여행자는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하나의 여행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출발점과 시작점을 알아야 합니다.
성당만 나온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각자의 목적지는 각자가 정하는 것입니다.
방향은 자신이 잘 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당을 열심히 나오면 방향을 잘 정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 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성당에 나와서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두 제자의 방향이 극명하게 구별됩니다.
가리옷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유다는 어둠으로 나아가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려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3년씩이나 따라다녔지만 계속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방향과
반대로 가려 했습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도 자칫 가리옷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묻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당에 나와 예수님께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간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죄를 이기는 복음삼덕이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실질적인 신앙의 출발점은 죄로 이끄는 세 욕망인 ‘삼구’이고 그 목적지는 죄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복음삼덕”인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만 따랐고 베드로는 이 복음삼덕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몸으로만 따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교만과 육욕과 소유욕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 그 순교를 피해갈 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도 오늘처럼 또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십자가를 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십자가 순교의 영광으로 나아갑니다. 
 
갈멜 수도회를 개혁했던 두 분이 계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입니다.
이분들은 얼마나 힘든 회칙을 주장하였던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같은 수도회 수녀들에게도 미움을 받았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수사들에게 몇 달 동안 갇혀 심한 박해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쓴 첫 회칙은 너무도 엄격하여 그의 제자들이 불태워버렸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으면서 여전히 삼구에서 머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신자들 가운데서는 지옥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보다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신앙생활의 방향을 잃고 있는 지금입니다.
이 세상에 머물며 영화를 누리는 것이 신앙의 목적인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세계관은 이 세상에서 탈출하여 십자가로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지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어디론가 향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예수님의 십자가 삶과 가까워짐을 의미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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