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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4-05 조회수 : 637
4월 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사야 50,4-7
필리피 2,6-11
마태오 26,14-27.66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가 아니면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이다’가 되실 수 없다 

 
제가 자신을 낮추고, 버리고, 죽이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어떤 분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왜 인간의 가치를 그렇게 비하하느냐?”라고 반발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고 그래서 인간 안에 하느님처럼 될 요소들이 다 들어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은 맞지만, 자칫 이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필요 없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말이 되기도 합니다.  
 
영성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여야 하는 자기부정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영성의 길은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성녀 로사로 유명한 페루의 수도 리마에 또 다른 유명한 성인이 계십니다.
일명 ‘빗자루 수사’로 알려진 마르티노 데 포레스 성인입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스페인 귀족의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혼혈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피부를 닮아 흑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혼혈이나 흑인은 노예 정도로 취급되어 백인들이 흑인들의 몸에는 영혼이 들어있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1579년에 태어나서 1639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도미니코 수도회의 평수사로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이발, 상처 치료, 의류수선 등뿐 아니라 남들이 꺼리는 청소까지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빗자루 수사’란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 저급한 일만 하느냐고 물으면 성인은
“저는 불쌍한 노예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수도회 재정이 나빠지자 성인은 수도원장에게 찾아가 “저는 수도원의 재산이니 저를 노예로 팔아 빚을 갚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하느님 모상성을 해치고 인간 존엄성을 무시하는
행동이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이를 ‘모든 것’(Everything)이 되게 하십니다.
당신이 ‘모든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과만 짝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동물과도 소통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무서운 병들을 기적적으로 치유하기도 하고, 기도 중 두 번이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다른 수사들도 목격하였습니다.  
 
심지어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나기도 하고, 몸에서 빛이 나와 기도하는 방을 가득 채우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기적들로 마르티노 수사와 함께 해 주시자 많은 사람이 그를 성인으로 대하였고 고아원을 설립하려고 할 때 마르티노 수사의 성덕을 보고는 많은 재정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빗자루를 놓지 않고 자신은 그저 불쌍한 노예일 뿐이라고 말하며 평수사로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신을 Nothing으로 만드는 사람에게만
주님께서 Everything이 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왜 ‘나귀’일까요?
왜 사이비 교주들처럼 백마를 타고 당신 백성들 속으로 들어오시지 않으셨을까요?
나귀는 당신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진 자신을 버리고 순종하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는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이집트로 양식을 얻으러 왔을 때 당시 재상으로 있었던 요셉은
형제들에게 올가미를 씌워 베냐민을 자신의 종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말했던 인물이 유다입니다.
요셉은 유다의 희생적인 마음을 보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자신들에게 했던 형제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유다와 같이 우리 죄를 없애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시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됨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유다에게서 그러한 왕이 날 것이라고 말하며 축복을 줍니다.
이 축복 속에 나귀가 등장합니다. 
 
“그는 제 어린 나귀를 포도 줄기에, 새끼 나귀를 좋은 포도나무에 매고 포도주로 제 옷을, 포도의 붉은 즙으로 제 겉옷을 빤다.”(창세 49,11) 
 
포도주로 옷을 빨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치 피를 흘리는 사람처럼 됩니다.
이사야는 구원자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라 “어찌하여 당신의 의복이 붉습니까? 어찌하여 포도 확을 밟는 사람의 옷 같습니까?”
(이사 63,2)라고 물어봅니다.  
 
에돔에서 오는 구원의 큰 능력을 가진 분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혼자서 확을 밟았다.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와 함께 일한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분노로 그들을 밟았고 진노로 그들을 짓밟았다.
그래서 그 즙이 내 옷에 튀어 내 의상을 온통 물들게 한 것이다.”(이사 63,3) 
 
히브리어에서는 포도즙에서의 ‘즙’이나, 인간의 ‘피’나 같은 단어(네짜흐)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이사야서의 피로 물든 구원자의 모습이나 창세기의 유다의 후손인 그리스도 왕의 모습이나 다 같은 십자가의 피 흘리시는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이 Nothing이 됨을 통해 세상의 Everything이 됨을 보여주는 신비가 ‘나귀’와 연계되는 것입니다. 
 
나귀는 포도나무에 매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포도나무로서 당신 피를 내어주십니다.
그 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받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성령을 받는 이들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는 이들은 성령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귀가 두 마리 등장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즈카르야서 9장 9절을 인용합니다.  
 
암나귀는 그리스도를 등에 업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그 새끼는 그 어머니를 본받는 새로 태어나는 자녀입니다.
암나귀와 새끼나귀는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에 매여 그분에게서 오시는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교회의 모습은 마치 나귀처럼 그분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자신이 ‘어떠한 존재’(Something)가 되려 한다면, 자신 등에 타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에게서는 ‘모든 것’이 아닌 또 다른 ‘어떠한 존재’밖에 되지 않으십니다.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것’임을 전하는 이가 되려면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많은 고통 받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사순절을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사순시기는 특강으로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사순 특강이 다 끝나갈 이맘때쯤 마음의 큰 공허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니 기뻐야 하는데 마음은 공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원인을 살펴보니 제가 자신도 모르게 많은 강의와 박수를 받으면서‘어떠한 존재’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존재가 되니 그 많은 사람의 칭찬과 박수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참 행복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전부가 되지 않으시고 그저 어떤 분이 되어버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해 ‘나뭇가지와 겉옷’을 깔았습니다.
나뭇가지는 그분을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고, 옷은 자기를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수윈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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