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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4-04 조회수 : 734

4월 4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에제키엘 37,21ㄴ-28
요한 11,45-56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알려주러 세상에 오셨다 

헨리 벤 다이크(Henry Van Dyke)의 저서 「네 번째 동방박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 외에 알타반(Altaban)이라는 동방박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세 가지 예물 즉, 루비, 사파이어, 진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이 말을 타고 베들레헴쯤 도착했을 때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급한 알타반은 망설이다가 그를 돕기로 하고 세 박사 일행을 먼저 보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낙타에 싣고 주막 주인에게 맡기고는 루비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약속한 곳에 갔지만 세 박사는 떠났고 아기 예수님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하신 후였습니다. 
허탈해하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와 비명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로데왕이 사내아기들을 죽이기 위하여 보낸 군사들이었습니다. 
알타반은 아기를 구하기 위해 남은 예물 중 사파이어를 꺼내 병사의 대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 이집트로 갔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33년의 세월이 흘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타반은 놀라며 골고타로 뛰어갔습니다. 
 
‘33년이나 찾아 헤맨 왕이 돌아가시다니…. 진주를 주고서라도 구해야지.’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노예로 팔려가던 소녀가 알타반의 다리를 끌어안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은 그는 예수께 바치려던 마지막 보물 진주를 소녀의 몸값으로 주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드릴 예물도 없는데 왕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걱정할 때 큰 지진이 일어났고 기왓장이 그를 덮쳤습니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그의 귀에 커다란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이제 내가 너를 맞을 준비를 하겠다. 
나는 영원히 네가 나에게 주려고 한 것을 부족함 없이 갚아 주겠다.”
알타반은 그리스도와 함께 미소를 띤 얼굴로 평화로이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은 제가 조금 바꿔봤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께서도 기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당신께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에게 그것의 참 주인은 당신이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비교할 수 없는 은혜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선악과를 자신의 것인 양 여기는 것이나,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을 자신의 것인 양 지키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참 주인을 몰라본 덕에 부활의 상급은 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들어온 죽음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자신의 것인 양 지키려고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오늘 가야파 대사제의 입으로 이 진리를 말씀하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살려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을 자신들의 것인 양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다시 받을 공로를 쌓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한 이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세상은 이제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생명을 대하는 자세를 지닌 사람들과 유다인들처럼 대하는 사람들,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심판도 그렇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요즘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다시 ‘만민구원설’과 같은 이단적 사상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보다는 부활에 더 집중하려는 모습입니다.  
 
죽음 후에 지옥에 단 한 사람도 머물지 않고 다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희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후가 아니라 바로 그 죽음을 어떠한 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짐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로마로 순교를 당하기 위해 압송당하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자신의 죽음을 마치 천국에 들 수 있는 특권인 양 방해하지 말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 내 지상의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 나는 하느님을 뵙기를 원하며, 그분을 뵙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은 죽음이라고 하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 2,11 참조).  
 
그분과 이웃을 위해 내 생명을 내어놓는 삶이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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