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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3-26 조회수 : 564

3월 26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교회에 대한 믿음이 구원을 위한 믿음의 시작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높은 수준의 믿음에 다다르는 순서’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왜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지도 설명해주십니다.  
 
조금 어렵지만, 오늘 복음을 잘만 이해하면 왜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사이비나 이단에 빠지는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한 몸이 되려 세상에 오셨음을 믿음으로써 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먼저 ‘세례자 요한’이라는 사람을 선지자로 파견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믿은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께로 왔습니다.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습니다. 
 
요한의 증언을 본 이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았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죽어가던 아이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의 힘’을 본 것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 곧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그다음은 ‘아버지’께서 직접 증언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아버지의 증언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안에서만 아버지의 증언이 유효합니다.
아버지의 증언은 곧 당신의 “목소리”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다다르면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자라납니다. 
 
그다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라고 하십니다.
보통은 성경을 믿으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을 순서대로 나열해보겠습니다.
세례자 요한 =>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 => 그리스도 => 아버지 => 성경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증언하는 것 중에 성경을 왜 맨 끝에 배치하신 것일까요?
왜 성경을 읽으면서도 많은 사이비와 이단이 생겨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이 산을 넘다가 무덤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그 무덤의 묘비에 그 무덤에 관한 이야기들이 적혀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국 전쟁 때 매우 추운 어느 겨울날 미군의 트럭이 연료가 떨어져
어떤 다리 위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런데 다리 밑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내려가 보니 한 어머니가 겉옷으로 아기를 감싼 채 죽어있었습니다.
한 군인이 어머니를 묻어주고 아기를 양자로 삼아 미국으로 데려가 키웠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청년이 되었을 무렵 아들을 데리고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청년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무덤에 덮어드리며 “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어느 순서로 발전하였을까요?
순서상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 => 양아버지의 증언 => 무덤 => 어머니 => 겉옷을 벗음 => 아버지 => 묘비 
 
오늘 복음으로 보자면 ‘양아버지는 세례자 요한’이고,‘무덤은 그리스도의 일, 혹은 표징’이며, ‘어머니는 그리스도’이시고,
‘겉옷을 벗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실천해야 하는 십자가 사랑’이고,
‘아버지는 하느님 아버지’이시며, ‘묘비는 성경’입니다.
이 묘비를 읽고 있는 사람은 지금 ‘성경’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양아버지의 증언이 없으면 아이는 믿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먼저 파견하신 이유는 그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하시는 모든 일은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향하게 만드는 표징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이것을 볼 수 있도록 문자로 남깁니다.
그것이 성경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오지 않는 이유를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뜻보다는 자기 뜻을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버려야 하느님 뜻을 실천할 텐데, 이웃을 위해 자신을 버릴 뜻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무덤을 만나면 옷을 벗어야 하는데, 옷을 벗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양아버지의 말부터 거부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증언부터 믿지 않으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구원을 주는 믿음에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8)라고 하며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3,11),  
 
또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4)라고 가르칩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줄 마음이 없으면 아예 믿음의 길을 시작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진화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 => 교회의 증언 => 성사(그리스도의 일; 표징) => 그리스도 => 십자가 => 아버지 => 성경 
 
신천지는 거짓말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거짓이 얼마나 안 좋은지 잘 압니다.
우리나라가 그나마 코로나19에 잘 대처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투명성’이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신천지의 성경공부에
화들짝 놀라 당장 성경공부를 그만둘 것입니다.  
 
그곳에 빠지는 이들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교리는 선한 의도로 하는 거짓말까지 금지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참 사랑을 실천하게 해 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증언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한 믿음에 다다랐을 때야 성경이 온전하게 해석되어 참 표징이 됩니다. 
 
바오로가 교회에 대한 믿음에 들어오지 않은 채 한 모든 행동은 본인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이후에 성경도 올바로 해석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교회의 증언은 먼저 믿지 못하면 그 이후의 믿음도 비뚤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먼저 교회의 가르침을 믿읍시다.
교회는 성체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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