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2일 [사순 제4주일]
믿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죽을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몬테팔코라는 동네에 가면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가 모셔져 있습니다.
8백 년이 지났지만 신체가 썩지 않는 성녀로도 유명합니다.
성녀는 어렸을 때부터 수녀원에서 살아서 정결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신심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매우 슬픈 표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성녀가 예수님께 왜 그리 슬퍼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은 “지금 시대에 내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너무 슬퍼진 성녀는 “예수님, 그러면 당신의 십자가를 제 심장에 꽂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성녀의 심장에 꽂았습니다.
아마도 성녀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심장에 불화살을 맞은 것처럼 큰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성녀가 20대 중반쯤 기도 중 탈혼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동료 수녀들은 성녀의 심장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였습니다.
분명 그런 일이 있고 나서의 수녀님의 변화가 그 수녀들에게도 믿음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녀들이 글라라 수녀의 몸을 열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큰 심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심장을 칼로 갈라봤더니 그 심장에서 예수님의 수난 도구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채찍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심장 살이 그런 모습으로 응고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글라라 성인은 수백 년 동안 매우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믿음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에게 옆 아씨시의 글라라 성녀를 더 많이 찾고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는
거의 잊혀가고 있습니다.
16세기까지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만큼 관심을 끌었던 성녀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부담스러운 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그분의 십자가의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 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나를 죽이는 십자가로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성당에서도 십자가 없는 예수님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십자가의 신심을 잃으면 참 예수님의 신심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면 우리에게 먼저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왜 태생 소경이 치유된 것을 보고도 유다 지도자들은 믿지 않고 그를 내쫓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가난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왜 가난하고 병들고 죄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쉽게 받아들였을까요?
그들은 삶이 지치고 힘들어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반면 부자고 지식과 권력을 지닌 이들은 왜 예수님을 배척했을까요?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변해야 함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표징을 보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표징이 부족하다고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변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아주 작은 표징에도 민감합니다.
마태오는 그저 “나를 따라라!”(마태 9,9)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갑자기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얼마나 세리로 살아가는 삶이 지겨웠으면 그렇게 쉽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없던 눈이 생겨서 온 사람의 증언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자신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버리면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함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눈을 뜬 태생 소경은 아무리 미소한 표징이라도 잡고 따라갔습니다.
누군가 진흙으로 자신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자 그렇게 하였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도 그 사람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죄를 짓고 사는 지금의 자신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하여 조금이라도 변화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그렇게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요?
파라오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파라오의 지배 아래에서 종살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누구도 우리 자신에게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 성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습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 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다시 한 번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러고는 마카리우스가 당신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으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그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와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마카리우스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진배없단다.”
변화는 이전의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지금의 자신을 죽이기 싫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는 것부터 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씻었는데 눈이 낫지 않았다면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비웃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존심을 버리고 실로암에서 눈을 씻는 행위는 이미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의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아야 할 만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표징으로 보일 것이고 쉽게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을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십자가에 죽을 마음이 없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은 생겨날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죽을 거 같아서 안 믿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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