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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3-15 조회수 : 579

3월 15일 [사순 제3주일] 

목마르지 않으려면 우물이 되어라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갈망함으로써 찾을 수 있느니라.” 
 
“그렇지만 저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분을 찾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자 스승은 제자를 데리고 강에 가서 제자의 머리를 물속에 밀어 넣고는 몸부림칠 때까지
붙들고 있었습니다. 
 
“자네 머리를 물속에 넣었을 때 왜 그렇게 몸부림을 쳤나?”
“숨이 막혀서 그랬습니다.”
“바로 그렇게, 갈망하라.”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갈망을 세상 것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망의 양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세상 것을 갈망하는 만큼 하느님께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나의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세상 행복에 대한 갈망엔 무감각해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한낮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한낮은 사람이 갈증을 가장 많이 느끼는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이는 그 여인이 무언가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갈증을 느끼며 살아갈까요? 바로 ‘행복’입니다.
물은 고생고생해서 길어가도 내일이면 또 목이 마르는 그런 세상의 행복들을 상징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세상 것들로 행복을 좇으면서도 항상 목이 말라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돈과 명예와 쾌락 등의 모든 것을 가지고도 허기가 지고 목이 말라 참을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세상 목마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목을 채울 물을 청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먼저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궁핍하여 돈이 좀 솟아 나왔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돈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이는 에사우가 야곱에게 불콩죽을 좀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야곱처럼 에사우가 자신에게 장자권까지 넘겨줄 수 있는 인물임을 안다면 죽 한 그릇 주는 것은 일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물을 청하는 분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성당 가면 밥을 줘, 돈을 줘? 어? 다 돈 빼먹으려는 수작이야!”라고 말하며
성당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 샌디에고 외곽 지역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 한국전쟁에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한 청년이
자기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머니, 제가 돌아왔어요.”
“빨리 집에 오지 왜 전화는 하는 거냐?” 
 
“아뇨, 제가 호텔에 있는데요, 이제 갈 거예요.
어머니. 그런데 만나기 전에 할 말이 있습니다.
제게 아주 절친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부모가 다 없습니다.
일선에서 저와 같이 전쟁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두 눈을 잃었어요. 두 손도 없습니다. 이걸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데리고 가서 나와 함께 우선 한 일 년이라도 같이 살려고 합니다.
어머니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는 “뭐, 괜찮지.” 하고 소극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처음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며칠 있으면 지겨울 거다.
네가 데리고 온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피곤하게 되고 괴로워질 거야.
얘야, 그러지 말고 어서 집으로 들어오렴.” 
 
아들은 “잘 알았습니다.”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다음 날, 해군 본부로부터 그 어머니한테 전보 한 장이 날아들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달려가 보니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눈멀고 두 팔이 없는 것은 바로 자기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가 드리는 작은 희생쯤은 장자권에 비해 불콩죽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물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하느님 나라의 상속권까지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생명의 물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 물은 이 세상의 행복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물을 얻기 위해 조금이라도 이 세상 행복을 봉헌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행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사마리아 여인은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남편이 여섯이나 되니 얼마나 세상 행복을 갈망했던 여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이 마치 정오의 뙤약볕처럼 목이 말랐던 이유는 세상 물을 통해 행복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좀 특별합니다.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이 곧 샘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그 사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물로 물을 뜨러 오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 자신이 우물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이제 생명의 물을 내어주는 샘이 됩니다.
그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그 기쁨이 영원히 그 사람 안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을 통과하는 것이 자신을 채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어령 박사는 자신을 “평생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자신은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목마름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명예를 달라고 글을 썼더니 명예가 생겼고 돈을 벌려고 애쓰니까 돈이 생겼다.
또 병 때문에 병원에 다니니까 병이 나았다.  
 
어느 날 너무나 외로워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글을 봐도 채워지지 않는
‘혼자’라는 절대고독에 괴로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갈증이 바로 진리에 대한 갈증이요,
창조주에 대한 목마름임을 깨닫게 되었다.”
참 야곱의 우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 옆구리가 뚫리게 하심으로써 생명의 물인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이웃에게 성령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곧 야곱의 우물입니다.
성령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마치 빵과 포도주를 미리 봉헌해야 성체, 성혈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을 받으려면 이 세상에서 내가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어느 정도는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당에 가서 한 시간도 앉아 있지 않으면서 우울해서 못 살겠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세상 행복을 추구하던 두레박을 내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을 주시는 분 옆에 앉아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세상 행복을 내어주는 우물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우물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뙤약볕에 고생하며 또 다시 목마를 물을 푸고 있습니까?  
 
세상 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물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의 증거는 내가 주님께 어떤 세상 행복을 봉헌하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물 한 모금 드립시다.
그러면 나를 영원히 샘솟는 야곱의 우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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