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주보

수원주보

Home

게시판 > 보기

오늘의 묵상

3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3-02 조회수 : 549

3월 2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이렇든, 저렇든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두 수도자가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다퉈보세!”
그러자 다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툴 줄을 모르네.” 
 
다시 첫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가 자네와 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놓고 ‘이건 내 거야!’라고 말하면 자네는 ‘아냐, 그건 내 거야!’라고 말하는 거야. 그럼 싸움이 시작될 걸세.” 
 
그래서 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놓았고, 첫 번째 사람이 “이건 내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사람이 “아냐, 그건 내 거야”라고 말한 뒤에 이내 마음이 편치 않아 “맞아, 그건 자네 거야. 어서 가져가게.”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사람은 도무지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막의 교부들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교부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싸움을 함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는 것이고, 싸움을 할 수 없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본성’이라는 것으로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개의 본성은 두 발로 걸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고
사람의 본성은 두 발로 걸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서도 훈훈한 이야기들도 들려옵니다.
특별히 대구지역 의료진들이 턱없이 모자라 밤샘을 하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 많은 의료인들이 돕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일을 해야 해서 직접 돕지 못하는 사람들은 의료진들의 안전을 위해 기부금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불평만 하면서도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에 발 벗고 나설까요?  
 
발 벗고 나서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더 불편해서 그럴 것이고, 그냥 있는 사람들도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럴 것입니다.  
 
이렇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두 부류로 나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 
 
오늘 복음에서 ‘양과 염소’로 나뉘는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으로 분류되면 천국으로 염소로 분류되면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내가 굳이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그러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게 한 사람들은 ‘양’으로 분류될 것이고, 그냥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될 때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염소’로 분류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는 각기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예수님을 향한 행동인지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언제 예수님인줄 알고 그랬느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당신 자신처럼 여기십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하는 행동이 곧 당신께 하는 행동처럼 여기십니다.
그렇게 당신과 함께 살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보이지 않아도 도울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서는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능력만으로는 ‘아버지의 집’에, 하느님의 생명과 지복에 다다를 수 없다.”(661항)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선행은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 태어남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로마 6,4)”(537항) 
 
사람은 성사로 새로 태어남으로 바뀌는 것이지 바리사이-율법학자처럼 흉내를 낸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려고 노력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나 선행을 해야만 하고, 그 공로를 자신에게가 아니라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신 분에게 돌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양’입니다. 
 
<어제 “성경공부를 좋아하면 이단에 빠질 확률이 크다”란 제목을 오늘 다시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는 신중하지 못한 제목이어서 사과말씀 드립니다.  
 
이는 성경공부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이단이나 사이비가 성경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시작된 우리 가톨릭교회는 성경공부에 할애하는 시간보다는 교리공부에 할애하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한다는 의미로 쓴 것임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리의 기둥은 성경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