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웃이 신랑처럼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으면 단식해야 할 때이다
미국의 존 머레이는 한 푼의 돈도 헛되게 쓰지 않는 검소한 생활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어느 날 머레이가 밤늦도록 독서를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켜놓은 촛불 2개 중 하나를 끄고 정중히 할머니를 맞았습니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는 겸연쩍게 말했습니다.
“선생님께 기부금을 부탁하려고 왔어요.
거리에 세워진 학교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조금만 도와주세요.”라며 간곡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머레이는 돕겠다는 대답과 함께 5만 달러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선뜻 거액을 기부하겠다는 말에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조금 전에 촛불 하나를 끄는 것을 보고 모금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거액을 기부하겠다니 기쁘고 놀라울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머레이가 대답했습니다.
“독서를 할 땐 촛불 2개가 필요하지만 대화할 때는 촛불 하나면 충분하지요.
이처럼 절약해왔기 때문에 돈을 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제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절제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하느님은 절제하고 단식하는 것 자체로만은 칭찬을 해주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잘못된 단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단식은 나를 작게 만들이 이웃을 크게 보려는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웃을 판단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단식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작게 보고 자신을 찾아와주는 사람들을
감사하게 맞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해 단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주 단식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단식은 자신을 작게 만들어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인데
이들은 단식하는 것으로 이웃을 판단하니 잘못된 단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커지는 단식은 거짓 단식입니다.
성녀 글라라 수녀는 부잣집 딸이었지만 수도원에 들어가서부터는 일부러 딱딱한 나무 침대 위에 잤으며, 목과 손목에는 꽤 묵직한 쇠 목걸이와 손 목거리를 달고 잤다고 합니다.
한번은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만 성이 나서 자기도 상대를 비판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 다음 순간에 클라라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바늘로 혀를 두세 번 찔러 사흘 동안 말을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단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단식은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우리의 신랑이 아니실 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랑이신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신랑이시라면 나는 그분의 뜻을 따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행복할 것입니다.
누가 신랑이 함께 있는데 신랑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단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웃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이웃을 심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랑을 빼앗긴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웃 모두가 나의 신랑처럼 여겨질 때까지 어쩌면 우리는 꾸준히 단식해야 하는 지도 모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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