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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2-23 조회수 : 573

2월 23일 [연중 제7주일] 
 
억울하게 죽어야 진리가 드러난다  
 
영화 빠삐용의 실제 주인공은 ‘앙리 샤리에르’라고 합니다. 
그는 20세 때 파리 시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 당했습니다. 
검사는 거짓 증인을 내세워 그에게 살인자로 누명을 씌웠고 샤리에르는 중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검사에 대한 복수심으로 탈옥을 결심했고 탈옥 후에는 남미 곳곳을 다니면서 갖은 일을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자신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나자 그 검사를 죽이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복수에 대한 다짐으로 과거에 누명을 당했던 거리를 거닐 때 그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내가 복수를 포기한 대가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는 이겼다. 친구여. 너는 자유롭고 사랑받는 네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에 있다. 
네 원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라. 그들은 과거의 한 부분일 뿐이다.” 
 
37년 동안 스스로 가두어 두었던 자신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진짜 감옥은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 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사랑이라는 참 진리가 솟구칩니다.  
 
그러니 나를 밟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밟혀주고 죽어주십시오. 
나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고 진리가 드러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사람이 지렁이를 죽이려고 한 번 발로 밟았는데 죽지 않고 꿈틀거린다면 그냥 포기하고 지나갈까요? 죽을 때까지 밟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때문에 아파하는 지렁이를 보면 죄책감이 더 들기 때문입니다.  
 
혹은 ‘어, 이게 안 죽네?’라며 안 죽는 것을 반항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밟게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악의를 가진 사람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려 했는데 죽지 않으면 더 미워져서 끝장을 내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죽어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선이 죽고 악이 승리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은 내가 죽을 때 드러납니다. 
선이 드러나면 악도 함께 밝혀지게 됩니다. 
어쩌면 죽으려하지 않는 내가 선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악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억울함을 제일 많이 겪은 사람은 요셉일 것입니다. 
형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이집트로 끌려가 노예로 팔렸습니다.  
 
이집트에서도 주인 포티파르의 집에서 충성하다가 그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힙니다. 억울한 일입니다. 
요셉은 포티파르의 아내뿐만 아니라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포티파르에게도 억울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기 아내를 범하려고 한 노예를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너무 약한 형벌이 아닐까요? 
당시 노예는 물건과 같아서 포티파르의 신분이었다면 즉결처분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감옥에 가둔 것은 사실 포티파르가 아내를 믿었다기보다는 요셉을 믿었다고 보아야합니다. 
 
비슷한 예로 로마 시저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이 난 적이 있습니다. 
조사해 보니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저는 아내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왜일까요?  
 
“시저의 아내는 소문도 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남자의 심리일 수 있습니다. 
 
포티파르가 사실보다 명예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속성 때문에 요셉을 감옥에 보낸 것이고 
요셉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억울해도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또 그렇게 포티파르의 아내가 악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포티파르의 명예를 살리기 위해서 이런 억울함을 당해야 했고 그래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억울하다고 항소했다면 진짜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섭리에 맡겼습니다. 
 
몇 년 뒤 요셉은 파라오 다음의 권력을 쥐게 됩니다. 포티파르보다 높아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수를 했을까요? 아닙니다. 
진리가 드러나고 자신이 죽음으로써 자신의 가족들이 굶어죽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해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암담해 보이지만, 하느님이 이끄시는 길은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요셉은 억울함을 가지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감옥은 파라오를 만나기 위한 
지름길이기도 했습니다.  
 
억울하다고 느낄 때,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의탁하십시오.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어떻게 드러내셨을까요? 
당신이 죽으심으로써 드러내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하느님이 선이시고 당신을 죽인 이들이 악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끝까지 살려고 하셨다면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진리는 영원히 드러날 수 없었고 
사람들은 무엇이 악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지렁이를 밟는 사람은 지렁이가 죽었을 때에야 
‘내가 왜 애꿎은 지렁이를 죽었지?’라고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진리가 그때서야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 나를 밟을 때 밟혀주십시오. 죽어주십시오. 
그러면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회개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지 않을지라도 어쨌거나 진리는 내가 죽어야 드러납니다.  
 
사실 진리를 가리는 것은 살아있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죽을 때 많은 이들이 진리를 보고 악에서 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십자가의 삶입니다. 
억울하다고 꿈틀거리면 더 밟힐 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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