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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2-21 조회수 : 464

2월 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자신을 죽일 무언가를 만났을 때다  
 
인도의 썬다 싱(1889-1929)은 부유한 시크교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외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으나, 항상 내적인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느꼈습니다.  
 
결국엔 참 진리를 찾지 못하면 죽고 말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됩니다.
그는 3일 동안 단식하며 골방에서 결사적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신이여! 만일 당신께서 살아 계신다면 저를 만나 주소서.”
그때 라호라로 가는 밤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갔습니다.
다음 열차는 다음날 아침 5시 급행 열차였습니다. 
 
“신이여! 만일 다음날 아침 5시 급행열차가 지나가기 전까지 나타나 주시지 않으시면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져 죽겠습니다.” 
 
썬다 싱은 목욕을 하고는 다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새벽 4시 30분이 되었습니다.
그 때 방문 쪽에서 환한 빛이 비치며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져 있고 양손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썬다야!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찾는 길이니라.”
“신이여! 누구십니까?”
“나는 너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니라.” 
 
썬다 싱은 그 순간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이후부터 썬다 싱을 기다리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어내기 어려운 박해와 고난이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위협과 회유를 물리쳐 더 이상 집안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중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지역,
영국, 스위스, 스웨덴, 독일 등의 유럽과 미국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돌에 맞고, 감옥이나 우물에 갇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맨발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고 에베레스트를 넘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극심한 박해와 고난 속에서 그는 한 번도 절망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몸이 아파 말을 할 수 없을 때는 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히말라야의 산길에서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걸 목격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 이후로는 어떠한 소식도 없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는 동방의 프란체스코라 불리고 20세기의 바오로라 불립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기 부정적인 종교성을 지켜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부정 위에다가 성 프란체스코의 탁발전도를 나의 이상으로 삼고 살리라.
죽을 때까지 인도적인 터번에 홍포를 입고 복음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리라.” 
 
썬다 싱이 진리를 만나지 못하고 편한 부유층 아들로 살아갈 때가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온 삶이 고통뿐인 복음을 전할 때의 삶이 더 행복했을까요?  
 
우리 각자는 무엇이 더 행복한지 느끼는 대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와 복음’이 들어왔는데도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절로 잃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복음’, 즉 ‘진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 목숨을 먹으며 자랍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래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진리 자체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안락함을 유지하려는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싫지만 단식은 하고 싶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리를 품고 목숨을 잃으며 사는 것이 행복하게 보인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던 그 진리가 곧 영원한 생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국내 최고 재벌 자리에 올랐던 정주영 회장은
성공비결에 대해 “모든 일을 할 때 목숨을 걸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80년대 일본 바둑계에서 ‘대삼관’을 차지한 조치훈 기사 역시 늘 바둑의 한수 한수를 목숨을 걸고 두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목숨을 걸 진리가 있다는 것, 그 복음이 육체적으로는 조금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삶의 의미를 깨우쳐줄 것이고
결국 오늘 복음말씀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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