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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2-19 조회수 : 558

2월 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이 나의 시력을 결정한다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을 때 라이언 긱스라는 전설적인 공격수가 있었습니다.
전성기 때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선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박지성 선수도 한국 대표팀에 한 명만 데려오라면 누구를 데려오고 싶으냐는 질문에
라이언 긱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긱스는 월드컵에서 뛰는 것을 한 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조국 웨일스가 월드컵 예선을 단 한 번도 통과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아무리 혼자 잘 해도 나머지 10명의 평균을 넘을 수 없습니다. 
 
오는 복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해주시는 사건과 장소의 이동이 겹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눈의 치유와 소경이 머무는 장소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도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바로 볼 수 있고, 또 시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선택하여 속한 가톨릭교회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로 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를 먹어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그들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십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곧 생명나무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람을 나무로 볼 수 없다면 성탄트리를 보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경의 첫 번째 눈을 띄워주시는 것은 바로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힘이 필요한데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는 행위나 그에게 안수하시는 행위가 다 성령을 주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자 그는 눈이 밝아져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어보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에 이 생명나무를 성탄트리로 장식하며 우리가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졌음을 입증합니다.  
 
예로부터 성탄트리 맨 위에 별을 달아 다윗의 별인 그리스도를 상징했고, 불을 밝혀 빛으로 오신 예수님임을 보여주었으며, 둥그런 밀떡을 달아 이 나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죄의 동네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공동체에 속하던 그 속한 사람은 그 공동체의 시력을 물려받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개신교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면 성탄트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성체와 성혈로 볼 수 있을까요?
그 공동체는 성체성혈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가졌던 믿음의 눈을 다시 잃게 됩니다.
그 영적인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믿음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에는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막에 어떻게
수령이 2,3천년쯤 되며, 높이가 100m를 넘고 둘레도 8-9m나 되는 큰 참나무 숲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이 덩치 큰 나무들이 깊이 뿌리를 박고 그 뿌리로 다른 나무들과
서로서로를 연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동체란 이와 같습니다.
서로서로 연결되어 그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각자의 믿음이 있습니다.
혼자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그 공동체를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 머물면 그 공동체의 평균정도는 자랄 수 있습니다. 
 
한 오케스트라에 속해있으며 혼자 다른 곡을 연주할 수는 없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하면 다른 믿음엔 다다를 수 없습니다.
각 공동체가 제공하는 시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벗어난다는 뜻과 같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 내가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결국 나의 영적인 시력을 결정함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눈의 치유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변화를 함께 이끄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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