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예수님을 만날수록 삶은 더 긍정이 된다
영국의 어떤 학교에서 학기 초에 ‘우수한’ 아이들로 편성된 학급이 ‘열등한’ 학급으로,
‘열등한’ 학급은 ‘우수한’ 학급으로 컴퓨터에 잘못 입력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교는 5개월이 지난 뒤 학사관리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황한 학교측은 컴퓨터의 오류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학생들에게
학기말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험결과가 놀랍게 나왔습니다.
원래 우수한 아이들의 성적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학기 내내 선생님들에 의해 열등하고 학습능력이 부족한 아이들로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둔한 학급의 점수는 크게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대단히 우수한 아이들로 여기고 교육하였고, 그들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을 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로 되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본인 안에서 샘솟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믿음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삶으로 그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 삶도 이렇게 돌아갑니다.
‘확신은 어떻게 삶을 움직이는가’라는 책을 쓴 울리히 슈나벨은 내가 만들어내는 모든 삶의 결과는 자기 확신이 자아내는 생각을 증명해 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애인과 해어졌다면 그는 이미 생각으로 자신은 애인과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애인과 헤어지며 ‘거봐, 결국 내 생각이 맞았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좀 황당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일면 맞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대로 되는 게 세상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병든 이들을 데려갑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그들을 치유해 주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고, 사실 그 믿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것이라 믿은 이들은 정말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큰 긍정입니다.
더 큰 믿음입니다.
작은 것을 들어주시면 큰 것도 들어주실 것이란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치유되게 하신 데에는 그들의 희망을 꺾지 않아서 삶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희망도 꺾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을 가까이하며 부정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19세기 최고의 시인 롱펠로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외롭게 숨졌고 두 번째 부인은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롱펠로의 시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임종을 앞둔 롱펠로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당신의 작품에는 진한 인생의 향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롱펠로는 마당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도 롱펠로가 사과나무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습니다.
예수님께 청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청을 다 들어주신 것 같지만 안 들어주시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안 들어주셨던 것은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고 다 들어주셨다고 믿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더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비의 가장 완전한 계시입니다.
그 자비와 만나면 더 부정적으로 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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