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 내 안에 잠든 예수님을 깨워라 >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 출신에다가 작가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무언지 모를 불안과 공포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다가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는 한 시골 농부를 만났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다가가 당신의 그 평화로움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농부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항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지요. 그래서 제 마음은 늘 기쁘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때부터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하느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또 다른 이름은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깨워주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서 잠을 자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왜 배 위에서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배는 몹시 흔들리고 물이 들이차는 상황이라 억지로 자는 척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계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당신을 부르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기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이것이 자신 안에 남아있는 자아의 욕심입니다.
나의 힘만으로 무언가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도 어떤 때는 명예욕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을 다 빼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우리 각자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힘이 빠졌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요?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남자는 한 여인을 좋아해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했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그 남자는 그 여자가 주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이 아니라 믿고 그 여자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우연히 그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것도 인연인지라
다시 한 번 청원해 보았습니다.
그때 수락하여 둘은 결혼하였습니다.
만약 그 여자를 잃는 두려움 때문에 10년 동안 쫓아다녔다면 그만큼 감정의 고통을 겪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길 줄 알았기에 10년을 평화로이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맡긴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가라앉히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겁을 내는 게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잃으면 잃는 것이고 얻으면 얻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해는 염분이 많아서 몸이 절대 가라앉지 않습니다.
사해에 들어갈 때 꼭 지켜야 하는 수칙은 뜨기 위해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괜히 몸을 움직이면 얼굴이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눈에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수영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튀어 눈에 들어가면 엄청 아픕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만 그래도 신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더 살아야겠다고 말합니다(필립 1,21-24 참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 자체가 자신의 모든 힘을 뺐다는 증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통해 모든 일을 하십니다.
이 경지까지 가기는 힘들지라도 나에게 어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때마다
오늘 복음을 되새기며 주님께 더 의탁하도록 합시다.
내 안의 잠든 예수님을 깨웁시다.
하도 자주 깨워서 예수님만 깨어있고 나는 편안히 잠자는 사람처럼 됩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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