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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2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1-20 조회수 : 491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 그리스도는 성령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 > 
 
혜경양은 학창시절 “혜경아 공부해라.” “TV 좀 그만 보면 안 되니?” “학교 갈 시간이야.”
등등의 어머니의 잔소리가 매우 싫었습니다.  
 
회사 다닐 때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어머니께서 무엇인가 물어보시면 나중에 얘기하자며
방문을 닫고 잠자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건강하시던 어머니께서 갑상선 암으로 성대 제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혜경양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듣기 싫던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그동안 어머니께 했던 행동들이 머릿속으로 하나둘 스쳐 지나갈 때마다 후회가 됐습니다. 
 
그 후로 혜경양의 행동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어머니의 입 모양을 보면서 대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재활의학 박사로부터 희망이 담긴 말을 들었습니다.
기계를 이용하면 성대를 대신해서 그 부분을 울려주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혜경아, 일 끝나고 온 거니?”
비록 기계의 울림소리였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감동과 기쁨의 눈물로 목이 메었습니다.
혜경양은 어머니 목소리의 가치를 알고부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받는 은총의 가치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보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내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로
증명됩니다. 천국의 비유에서는 땅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나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보물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준히 청하라고 하시며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보물인 성령의 가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바로 성령의 은총이고 새 부대는 그 은총의 가치를 아는 마음입니다.
같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그것으로 감동하여 인생이 바뀌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그냥 비타민처럼 영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 부대는 성령 받고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령의 가치는 얼마로 평가하며 살아갑니까?  
 
사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하느님의 목숨 값’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5)라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은 ‘성사’, 특별히 ‘세례’를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떤 때는 그냥 단순하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고도 말합니다
(1코린 12,13 참조).
구약에서 세례의 가장 큰 상징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紅海)’를 건너는 사건입니다
(1코린 10,2 참조).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즉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 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항)
라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깨끗이 빤 정결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묵시 7,14 참조).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작용으로 교회 안에서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981항)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이고 그 성령으로 인간의 옛 본성인 죄가 씻기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고해성사를 할 때, 성체를 영할 때도 성령으로 죄가 사해집니다.
그러나 그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의 대가임을 알 때에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 할 때마다 자신의 자녀의 팔을 하나씩 잘라야 한다면 죄를 지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 사함의 값이 그리스도의 목숨 값임을 믿어야 죄에서 멀어지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셔도 됩니다.
제 책에 대한 가장 큰 비판 중의 하나가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느냐?’,
혹은 ‘어떻게 어떤 때는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만, 어떤 때는 아드님만 하느님이실 수가 있느냐?’
는 것입니다.
성부-성자-성령, 세 분이 동시에 하느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이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사실 삼신론이라는 삼위일체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생각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이 의문에 대한 제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의견입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이 ‘하느님의 피’라면 당연히 성령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는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선물은 성령이시고, 성령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성령은 주시는 하느님은 죽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이것을 넘지 못하면 삼위일체신비는 그 사람에게 뜬구름잡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가치를 모르게 되어 성령이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됩니다.
자녀는 부모가 주는 음식에서 부모의 피를 발견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감사하고 변화하게 됩니다.
부모가 주는 용돈이 부모의 살과 피임을 믿을 때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씁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은총, 혹은 성사의 은총이 하느님의 목숨 값임을 알아야
성사생활을 통해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피이자 목숨임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성령’은 ‘죄의 용서’의 측면에서 ‘하느님의 피’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은 숫자 ‘50’으로 상징이 일치합니다.
교회에 성령께서 오신 날이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이란 숫자상 오(五: 5)와 순(旬: 10)이 곱하여진 날로 ‘50’을 상징하는 날입니다. 
 
창세기 18장에 하느님께서 죄로 가득한 소돔 땅을 유황불로 멸하시려 하실 때 아브라함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의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소돔 땅에서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창세 18,26)라고 하십니다.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집니다(에페 1,7 참조).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는 ‘50’과 연관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사람들을 ‘50’명씩 앉히신 것도 당신의 살과 피가 ‘50’과 관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루카 9,14 참조).  
 
그리스도의 피가 곧 그리스도의 성령이기 때문에 오십 일을 나타내는 오순절에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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