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7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 가장 큰 적은 자신 안에 있다 >
프랑스 왕국의 한 고관대작은 비밀편지를 미처 치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가 도둑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도둑이 누구인지 알았지만, 비밀편지라는 것이 들통날까봐 경시청 총감에게 은밀히 편지를 찾아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총감은 도둑의 집을 구석구석 다 뒤지고 심지어 천장 속, 벽까지도 조사했지만 찾지 못합니다.
총감은 뒤팡이라는 사립 탐정에게 부탁을 합니다.
뒤팡은 금방 편지를 찾아왔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았소?”
“편지는 편지 보관함 서랍 안에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설마 비밀편지를 그렇게 허술 하게 놓아두었을 리 없다고 생각해서 편지함은 열어보지도 않았는데...”
“경감님은 ‘자기 생각’으로 편지를 찾았지만, 저는 일단 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모두 내려놓고 ‘도둑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편지는 편지함에 넣어두어야겠더군요.
다시 제 생각으로 돌아와 편지함에서 편지를 꺼내왔습니다.”
사람 안에는 타인의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자기만의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면 자기만 믿게 되고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도 거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십니다.
자기의 생각이 곧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자기 자신을 버리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자기 생각’에 묶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난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에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꾸짖으십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 곧 사람을 ‘사탄’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돈과 육체적 즐거움과 명예만을 생각하게 시스템 되어졌습니다.
이것이 원죄의 영향입니다. 원죄는 뱀 때문에 비롯된 죄입니다.
교회는 인간은 원죄로 인해 생긴 악으로 기우는 인간 본성 때문에 끊임없는 영적 싸움을
치러야 한다고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405항 참조).
또 원조들의 죄로 악마는 인간에게 어떤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하고 “죽음의 지배력을 지닌 존재, 곧 ‘악마’의 권세에 예속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만약 인간 본성이 손상되어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교육, 정치, 사회, 그리고 도덕 분야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407항).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과 화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아가 뱀인 것을 모르면 독이 든 것을 모르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제 책에서 자아를 뱀과 같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이해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죄의 영향이 인간 안에 있어
마치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인간의 생각을 미혹한다고 말합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2코린 11,3)
이런 의미로 뱀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미혹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와를 유혹한 뱀이 사탄일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하와를 사탄과 두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뱀을 조심하지 않고 그 뱀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도 사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 안에 뱀과 같은 자아가 있는데 그 이유는 생존욕구는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것도 있고
그것이 있어야 하느님 뜻과 자신의 뜻 가운데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욕과 성욕과 교만이 자아의 욕구입니다.
자아는 길들여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가 뱀의 머리를 발로 밟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밟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도 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뱀에게 저주를 내리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성 이레네우스는 「이단 반박」에서 이 말씀을 성모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그리스도의 뱀에 대한 승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창세기의 이 구절은 ‘구속자 메시아’에 대한 첫 예고, 곧 뱀과 여인 사이의 싸움과
이 싸움에서 마침내 이 여인의 후손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처음 알리는 것”
(「가톨릭교회교리서」, 410항)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아는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위 창세기에서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는 또한 “발꿈치를 바라보리라.”,
“발꿈치를 보며 입을 벌리리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뱀에게 물리실 수가 없는 분들입니다.
뱀을 십자가에 매달고 발로 밟아 이기셔서 죄에 떨어진 적이 없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렸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11항 참조).
우리는 생각을 미혹하는 우리 안의 뱀과 싸워 이겨야합니다.
이 싸움을 하고 있어야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 뱀에 물려 죽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마치 뱀처럼 매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아를 죽이신 모습을 보고 우리도 각자의 뱀을 십자가에 매달아야 합니다.
자아는 결국 ‘자신의 뜻’이고 자신의 뜻이 죽어야 ‘하느님의 뜻’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분명 내 뜻은 아버지 뜻을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뱀의 유혹과 같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몸을 사랑하려면 몸을 괴롭혀야 합니다.
단식해야 하고 운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본성대로 방치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싸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도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항)라고 가르칩니다.
“자아 포기”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715항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이기셨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싸워나가야 하는 우리 안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