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2일 [주님 세례 축일]
< 얼마만큼 만나보셨습니까? >
행복을 단순히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 둘로만 나눌 수 있을까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고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도록 가르치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도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기에 ‘행복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얼마만큼 행복하십니까?”
혹은 “얼마만큼 행복해 보셨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만큼 행복했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으면 부모님께 사랑을 받을 때 하늘만큼 땅만큼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볼 때는 막대사탕 하나로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행복해 하는 그 모습이 완전한 행복의 정도가 아님을 잘 압니다.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면 계속 막대사탕만 주면 그 아이는 더 이상 행복을 좇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얼마나 행복했느냐는 물음을 다시 바꿔야만 합니다.
어른들은 잘 압니다.
행복은 사랑의 크기에 비례하다는 것을.
그렇다면 얼마나 행복했느냐고 물어보는 것보다는 “얼마나 사랑해 보셨습니까?”라고 물어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그 사랑을 더 키워가는 목적은 서로의 행복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믿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잘 안 하려하고 자녀도 많이 낳지 않으려합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사회 시스템 자체가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켜줄 수준이 안 되는 이유도 존재합니다.
누구나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받아 보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손가정에서 자라며 사랑을 만나보지 못한 자녀들은 사랑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 것만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최고의 사랑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 본 최고의 사랑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사람의 사랑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본 사랑은 늑대가 자기에게 젖을 준 사랑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 사랑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수준의 행복 이상은 느끼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또 질문을 수정해야겠습니다.
얼마만큼 사랑해봤느냐보다는 “얼마만큼 만나봤습니까?”로 말입니다.
만남의 깊이도 정도의 차이가 당연히 존재합니다.
그저 술자리 한 번 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평행 키워주신 부모와 같은 만남도 있습니다.
그 깊이가 절대 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과 영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만남 또한 육체적인 만남, 정신적인 만남, 영적인 만남의 수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의 만남이란 자신을 온전히 바꾸어놓는 오늘 성령을 받으셔서 당신이 하느님으로 변화되시는 그런 만남입니다.
영은 마음을 의미하는데 마음으로 만나면 상대가 자신 마음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온통 바꾸어놓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성령을 받으시고는 더 이상 가정에 머물지 않고 공생활로 나서는 이유와 같습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라는 영화는 이 만남의 정도가 사람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사랑이란 것은 받아본 적이 없는 고아입니다.
사채업자의 하수인으로 채무자의 몸을 절단하거나 장기를 팔게 만들어서 끝끝내 빚을 받아내는 잔혹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만큼 자신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이들 뿐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도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라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고 폭력까지 가하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폭력도 참고 자신이 어쩔 수 없이 키울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보속이라도 하듯이
아들을 위해 죽음까지 감수합니다.
아들을 괴롭히려는 사람이 있으면 목숨을 걸고 저항하며 아들을 지켜냅니다.
처음 받아보는 사랑. 아들은 허물어져갑니다.
처음으로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어머니가 있으니 너무 행복합니다.
이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선한 생활로 돌아가려는 무렵 어머니는 그 아들이 보는 앞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자신 때문에 힘들어 자살한 한 아들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복수, 그것은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든 그 사람에게 사랑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잃는 고통이 어떠한 지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야 눈이 떠진 그 주인공은 자신이 괴롭히고 파괴해 왔던 가정들을 몰래 방문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어떤 아픔을 주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그렇게 고통을 주었던 것에 대해 보속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 그들을 도와주며 자신은 죽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주인공이 비록 가짜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만나지 못했다면 사랑 때문에 받는 고통과 행복은 느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아프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행복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랑이 심장까지 다다르면 심장을 불살라 더 이상 이전의 심장이 아니게 됩니다.
이것이 참 사랑이고 참 행복이기 때문에 아빌라의 데레사는 하느님께 자신의 심장을 불화살로 꿰뚫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사랑을 만나본 사람은 사랑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참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불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시고는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살아가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만났다는 증거는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임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벗이라 부르시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을 만났다는 증거이고 참으로 행복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만나보았습니까?
저는 이번 주에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 주는 청년 피정의 지도신부를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눈물을 흘리고 새로 태어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반면 저와 봉사자들은 점점 시들어갔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 잠을 두어 시간밖에 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저러한 핑계로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충분히 자고 다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내가 만난 하느님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온전히 죽일 수 없다면 나는 온전히 하느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목숨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났다면 그 목숨을 내어줌이 참 행복인지 느꼈을 터인데
저는 육체적인 만족을 우선 채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강의를 아무리 잘해도, 미사를 아무리 감동적으로 하더라도 하느님은 저를 통해 그들을 만나기를 원하셨을 텐데 제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하느님을 충분히는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 끝나고 나니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다행히 지도수녀님과 봉사자들이 자신들이 만난 하느님을 자신들을 온전히 버려가며 증거 해 주었기 때문에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
그들도 이러한 감동과 눈물을 언젠가는 다시 기억하고 그 때의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이 ‘원체험’입니다.
지금 가톨릭 교리는 머리로만 하느님을 만나게 하기 때문에 심장까지 내려오는 체험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자신들의 삶이 우리가 만난 하느님을 어느 정도까지 만났는지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참된 세례를 통하여 온전히 우리 자신을 이웃을 위해 내어줄 수 있을 때까지 그분을 만났습니까?
그렇다면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계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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