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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1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1-11 조회수 : 658

1월 11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신부를 차지하는 것은 신랑이다."  

장발장은 매우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자베르 경감에게 쫓기는 신세로서 누구와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것은 상대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위험하고 사치스런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한 아이를 맡아서 키워야 했는데 그가 코제트라는 예쁜 여자아이입니다.  
 
장발장은 코제트를 통해 그동안 가져보지 못했던 감정을 가지게 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장발장이 코제트를 잘 키워내는 것이 자기의 부주의 때문에 자신의 공장에서 쫓겨난 팡틴이란 코제트의 어머니에 대한 보속을 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장발장에게 코제트는 삶의 또 다른 의미가 되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코제트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남자는 혁명 주동자로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저 잠자코 있으면 그 남자는 죽을 것이고 코제트는 다시 장발장에게 의지한 채 
둘은 예전처럼 의지하며 살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코제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코제트의 연인인 마리우스를 구하러 갑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도망 다니던 처지에다가 또한 자살한 자베르 경감에 대한 살인죄까지 누명을 쓰게 된 장발장은 더 이상 코제트와 함께 있어서는 안 됨을 깨닫고 둘을 결혼시키고는 조용히 그들 곁을 떠납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마리우스는 코제트에게 
“당신의 아버지는 성인이셨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인이라 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결정을, 그러나 옳은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일 것입니다.  
 
보통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머물러주기를 원하지만, 장발장은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포기합니다. 
아마 모든 아버지들이 딸이 결혼한다면 약간은 장발장과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딸의 행복을 빌어주며 신랑에게 신부를 건네줄 때는 자신이 죽고 나서도 
딸을 보호해줄 딸의 짝을 보며 안도의 마음을 갖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었고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까지도 모두 요한을 떠나 그분께로 갔습니다. 
그 중 처음으로 세례자를 떠나 그리스도께 간 인물이 요한과 안드레아였습니다.  
 
이에 세례자에게 남아있는 의리 있는 제자들이 세례자를 걱정하며 이렇게 간합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대답은 의외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신부를 차지하는 것은 신랑입니다. 
신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좋은 신랑을 맞는 것에 기뻐합니다. 
사실 스승과 제자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는 요한은 바로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한 신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만큼 자신의 제자들을 행복하게 해 줄 스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에 기뻐하기 때문에 성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리스도께 가는 길에서 신앙으로 만나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 갖는 애정을 놓고 싶어 하기 싫어할 때도 있게 마련입니다. 
누가 사랑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랑은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가 신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타고 와서 내려 그리스도께로 갈 수 있는 배와도 같습니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면 지금까지 함께 했던 사람은 떠나보내 줘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도,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그 사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모두 상처를 입게 됩니다. 
배를 떠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한 발자국도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항구에 도착하면 배는 멈추고 사람은 내려서 목적지로 계속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실화라고 합니다.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아들이 삶의 낙이었습니다.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아들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며느리보다 아들에게 더 잘해주려고 했습니다. 
반찬도 어머니가 해 주는 것을 먹어야 하고, 옷도 어머니가 사 오기도 하셨고, 심지어는 밤에 아들과 며느리가 잠자는 방 문 앞에서 지키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에 며느리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랬더니 결국 어머니의 이 집착을 참아오던 아들도 어머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며 
어머니 곁을 떠납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차지하는 것은 신부여야 합니다. 
어머니가 개입했다가는 모든 관계가 다 끊어져버리게 됩니다.  
 
우리와 우리가 아는, 혹은 우리에게 애정을 가진 사람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요한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그리스도의 첫 제자가 된 인물입니다. 
그의 복음 첫 장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말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첫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적지 않게 많이 나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가도록 보내준 스승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요한에게는 첫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가장 큰 성인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없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큰 칭찬입니다. 
자신이 잘 키운 제자를 당신에게 기쁘게 보내준 사람을 어찌 모른 채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길은 우리가 신랑이 아니라 유일한 신랑은 그리스도이시고 그분만이 신부를 차지할 권한이 있음을 깨달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참 신랑에게로 잘 인도하는 것입니다.  
 
도로 표지판이 도로 중앙에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길옆에 있어야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것은 신랑인 것입니다. 
나는 작아지고 그 분은 커지셔야합니다.  
 
버리는 것이 다시 얻는 길이고, 떠나보내는 것이 다시 만나는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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