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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2-28 조회수 : 465

12월 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요한 1서 1,5―2,2
마태오 2,13-18 
 
<​ 관계의 친밀도는 상대를 무엇 때문에 만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  
 
톨스토이가 길을 걷고 있는데 거지가 다가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주머니를 뒤져보았으나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 거지를 바라보면서 “형제여, 내게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금전이 없으니 용서하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고맙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형제여’라고 불러준 것이 나에게는 금전을 준 것 보다 더 기쁩니다.”라며 기뻐했습니다.  
 
한 번을 만나도 평생 만난 인연보다 더 친밀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엔 그 친밀함의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부부관계에서 시작하여 자녀들, 친구들 성당 교우들과 직장 동료들과의 만남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주관에 따라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내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오히려 처음 만난 사람보다 소원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그 긴 시간의 관계는 무엇이었나?’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이혼하면 그냥 남남보다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에너지를 많이 쏟는 것이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노력들이 허사가 되지 않는 방법은 잘 모릅니다. 
무엇이 관계의 친밀도를 높이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계가 진정 친밀한 관계일까요? 
아무래도 이해타산 없이 하늘이 맺어준 관계가 친밀한 관계일 것입니다.  
 
보통 가족 간에는 이해타산이 없기 때문에 “왜 만나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가족이니까요!”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러나 직장 동료들에 대해 왜 만나느냐고 물어보면 “먹고 살아야하니까요!”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타산이 섞여있는 관계는 친밀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해타산이 없는 관계란 “그렇게 정해졌기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하늘의 섭리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만나는 관계가 더욱 친밀도가 높은 관계인 것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자신의 책 ‘나와 너’에서 인간관계를 세 단계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가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상대를 어떠한 목적으로 보며 만나는 이해타산적인 만남입니다.  
 
위 이야기의 톨스토이처럼 이웃을 형제로 바라보는 ‘나와 너’의 관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너’와의 관계가 완전해지려면 상대를 ‘형제’로 만들어준 초월자 하느님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초월자를 부버는 ‘영원한 너’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관계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소명으로 여기기에 누구를 만나든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삽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이 순교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기념합니다. 
그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예수님 때문에 순교하였기에 예수님과 매우 친밀도가 높은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나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면 될 수 있는 한 보상을 해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도록 
섭리하셨다면 그 아기들을 그냥 버려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자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우리보다 더 나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병을 고치기 위해,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도깨비 방망이 정도의 ‘그것’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너’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물건처럼 대한다면 세상 사람들을 대할 땐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든 관계를 온전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너, 영원한 너로 보아야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모든 아기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그분만을 위해 죽을 수 있었던 것이 큰 복이었습니다.  
 
‘영원한 너’가 없는 관계는 남는 것이 없는 관계입니다. 
그저 상대를 이용하는 관계밖에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관계가 예수님 때문에 맺어질 수 있다면 이 세상이 곧 하느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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