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3일 월요일
말라키 3,1-4.23-24
루카 1,57-66
< 마지막에 기쁘게 끝났다면 하느님 뜻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
제가 어렸을 때 밤에 청사과를 먹었는데 심하게 체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소화가 안 되었던지 밤새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을 다 따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안 나아서 아침에 구토를 하였는데 그 청사과즙만 시퍼렇게 신물처럼 쏟아졌습니다.
그 이후로 청사과를 먹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몸은 아마도 자신을 아프게 한 것을 더 이상 먹지 말라고 그 마지막 맛만을 기억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평생 청사과 맛은 고통으로 남아있습니다.
대학교 들어가서는 술을 엄청 많이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침에 굉장히 힘들어서 고통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전날 얼마나 즐겁게 마셨는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즐겁게 마셨더라도 마지막 기분이 좋지 않다면
그 마지막 안 좋은 기분이 즐거웠던 기분마저 잡아먹게 됩니다.
왜 어떤 때는 마지막에 기분이 안 좋을까요?
대부분은 끝에 어떠한 감정이 올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당장의 만족을 위해 끝나고 나서의 기분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루 종일 과자만 먹으며 TV를 보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때의 기분은 어떨까요?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어떠한 감정으로 끝나게 될지 생각한다면 우리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떻게 마지막을 기분 좋게 끝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즈카르야의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만은 전통을 어기려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하고 말하고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항상 끝에 기쁨이 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뜻이나 세상의 뜻에 휩쓸리면 처음엔 기뻐도 마지막엔 항상 기분 나쁘게 끝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기분이 아주 오래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따라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려면 항상 ‘마지막 기분’에 집중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의 맛은 처음엔 쓰고 마지막엔 답니다.
그러나 세상의 뜻은 처음엔 달고 마지막엔 씁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어떻게 끝나고 싶으냐에 따라 어떤 뜻을 따를 것인지를 선택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어떤 정치가가 연말에 어느 탄광을 방문했습니다.
광원들의 얼굴은 땀과 탄가루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치가는 눈만 반짝이는 광원들이 불쌍하게 여겨져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날마다 이 굴 속에서 석탄을 캐는 단조로운 일을 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그러자 한 광원이 석탄덩어리 하나를 집어 들고 명랑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캐는 이 석탄이 빛이 되고 동력이 되고 열이 되어 가정과 공장, 사회와 국가를 움직입니다.
그래서 제 일이 즐겁습니다.”
성공해야만 뒤끝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이라 믿으면 기쁘게 끝낼 수 있습니다.
순교성인들도 그렇게 끝을 맺으신 분들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으면 좋은 경험을 했다고 여기지만 성공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뜻이 없으면 왠지 허무함만 느낍니다.
마지막 기분은 하느님의 뜻이 주는 의미에 달려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이 나의 삶 전반에 흐르게 하여 나의 모든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합니다.
소금처럼 모든 일에 양념으로 넣어야합니다.
그러면 일의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항상 기쁨으로 뒤끝 좋게 끝맺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 하느님의 뜻을 결합시켜봅시다.
일과는 좀 더 고되어 질지라도, 결국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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