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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1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2-17 조회수 : 560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 모든 법칙에는 창조자가 있다 > 
 
창세기 49.1-2.8-10
마태오 1,1-17  

독일의 담스타트라는 곳에 바슐리에 슐링크라는 분이 만든 집단 자급자족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는 철학박사이며 심리학 박사로서 이 공동체를 운영하는데 직접 농사를 지어가며 약 200명의 식구들을 자급자족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농약을 많이 쓰며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날 하느님께서 계시하시기를 “너희들만 먹고 살려고 하느냐, 새도 먹고 벌레도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어려워도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그대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벌레가 많이 끼어도 내버려두니 자연히 새들이 모여들고 새들이 모이니 농사가 잘 되고 결과적으로는 농사가 잘 돼 유기농 음식을 먹으며 200여명이 건강하게 사는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하느님은 보너스까지 주셨습니다. 그 땅은 원래 메마른 곳으로 버려진 땅이었는데 농장 한 가운데서 샘이 솟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샘을 ‘기적의 샘’이라 하여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갈 정도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은 어떠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자연이라는 시스템이 잘 유지되려면 그 자연 안에 사는 사람들이 그 법칙을 잘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원래 만들어진 목적대로 작동을 잘 하게 됩니다. 
 
자동차라는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도 그 설계도에 맞게 조립되어야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도 벽돌을 중간에 몇 개 빼놓고 지으면 무너집니다.
공동체라는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도 법칙이 필요합니다.  
 
국가도 법이 있고 가정도 그렇습니다.
각자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분열되고 와해됩니다.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은 어떠한 시스템을 만들어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 시스템을 만든 이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시스템이 있으면 법칙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칙이 있다면 그 법칙으로 유지되는 시스템을 만든 창조자가 반드시 존재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어떠한 법칙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법칙을 만든 창조자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개미집이나 벌집을 보더라도 각자의 시스템대로 만들어져있습니다.
벌들도 각자의 역할이 있고 벌집의 모양도 6각형이 수없이 쌓여진 형태입니다.  
 
누군가 잘 만들어진 벌집을 보면서 저절로 생겼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규칙이 있으면 창조자도 있겠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자연법칙의 총합인 자연이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자동차를 타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을 운전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세상은 벌집보다,
인간이 만든 자동차보다 훨씬 복잡한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다못해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도 법칙입니다.  
 
이 법칙이 와해되면 그런 지구에서는 더 이상 인간이 살 수 없게 됩니다.
자연의 시스템은 인간이 감히 다시 만들어보겠다고 엄두를 낼 수 없는 거대하면서도 복잡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에서만은 다 어떠한 법칙을 발견하면 만든 창조자를 생각하는데 지구와 우주의 더 엄청난 법칙들을 보면서는 그냥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창조자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자 없이 그 규칙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자신이 이용하는 시스템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얼핏 보면 참으로 의미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누가 책을 쓸 때 가장 앞에 의미 없는 이야기부터 꺼낼까요? 누구든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제일 앞에 놓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긴 족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은 하느님의 계획 하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오는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이스라엘이 시작된 것은 아브라함 때부터입니다.
그러나 다윗까지는 떠돌이 생활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참 왕국으로 만들어준 것은 다윗입니다.
그렇지만 바빌론 유배부터 또한 남의 나라에 지배만 당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또 다른 다윗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고 그 족보상 새로운 다윗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며 유다인들을 설득하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법칙이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메시아가 아닐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려고만 하고 머리를 조금만 쓰면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마태오의 이런 노력을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들을 보면서도 그 창조자가 있어야만 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전철을 되밟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 안에 하느님의 법칙이 개입한다면 분명 역사를 통해서도 창조자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모든 자연 안에서도, 사람 사는 법칙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법칙 안에 창조자의 손길이 배어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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