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6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 가죽옷을 원한다면 두렁이를 벗어라 >
민수기 24,2-7.15-17
마태오 21,23-27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입니다.
고향인 폴란드의 슐레지엔으로 가기 위해서 말을 타고 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려했던 대로 강도들이 나타났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말도 빼앗겼습니다.
강도가 물었습니다.
“숨긴 것이 없느냐?” “없습니다.”
“그럼 가거라.”
무사히 강도들 틈을 빠져나와 한숨을 쉴 때 바지춤에 비밀히 감추어둔 금덩어리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강도들에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는 너무나 무섭고 정신이 없어서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물을 때 없다고 대답했는데 가다보니까 이 금덩이를 숨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받으십시오.”
강도에게 숨겼던 금덩어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빼앗은 물건과 말을 내주면서 엎드리더니“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당신이 두렵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비록 강도일지라도 진실할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묻습니다.
올바른 대답을 들으면 수긍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해는 마음의 뜻 다음에 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이 이해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리 올바른 말을 들어도 절대 설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뜻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물으면서도 그분의 답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변화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감추어진 모습을 드러내시기 위해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의도를 감추려하기 때문에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왔다.”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라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라고 하자니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이 두려워
그냥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말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데 이미 변화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들을 가리기 위해 두렁이를 입은 상태가 이런 상태입니다.
자기를 가리는 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말은 칼과 같이 자신을 찌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패와 칼을 들고는 대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아야합니다.
하느님께 내 자신이 솔직해지는 방법은 규칙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나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드리면 그분도 솔직한 대답을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슴에 기댄 요한에게만 당신을 배신할 제자가 가리옷 유다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진리를 모두에게 알려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무장해제하고 당신께 더욱 깊이 안기는 사람에게만 당신의 진리를 들려주십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죽옷을 바란다면 나를 가리는 나뭇잎부터 떼어내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효봉 스님이 있습니다.
스님이 되기 전에 판사였는데 어떤 사람의 판결에서 사형선고를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판결이 오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판사직을 사임하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벗어던질 준비가 된 사람에게 하느님도 당신의 깊은 속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진리 안에서 살고 싶다면 진실과 다른 말과 행동이 자신에게서 절대 나가지 않도록 먼저 주의해야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