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다니엘 6,12-28
루카 21,20-28
<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
1800년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생각으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주장하여 조선 정부에 의해 체포되고 참형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입니다.
당시 조선 말기는 유학을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득권들은 유학의 본래 가르침보다는 벼슬을 팔아 자기 잇속을 챙기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산 관리들도 본전을 뽑기 위해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백성이 살기 힘들고 의지할 곳 없을 때 최제우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면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란 사상은 농민, 천민, 유생 할 것 없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득권들은 용납할 수 없는 사상이었고 사학을 가르치는 최제우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최제우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죽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그가 설파한 교리는 이후 지방 관리들의 약탈과 횡포에 신음하던
농민들이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녹두장군 전봉준을 필두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만드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당시 동학 농민군이 조선 정부에 요구한 것은 ‘탐관오리를 쫓아낼 것, 노비 문서를 불태울 것, 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일본과 내통하는 자를 처벌할 것, 인재를 골고루 등용할 것’ 등의 지금 눈으로 보면 지극히 정당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믿으면 무엇이 좋을까요? 세상에서는 박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태인들은 역사상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여 수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 “내가 하느님이오.”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잃게 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 안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진리가 그것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이니 우리 모두도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다
기득권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던 이들의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요한 19,7)
예수님은 당신도 하느님의 자녀라 해서 죽임을 당했지만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파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요한 20,17)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아버지도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가 하느님이면 자녀도 하느님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이니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사람으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니 자신도 걷겠다고 나선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된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나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아직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믿어야하느냐면 믿는 만큼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늑대에게 키워져 늑대라고 믿으면 늑대만큼만 크고 아버지를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이 됩니다.
유태인에게서 특출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금붕어가 어항에 있으면 손가락만큼 자라고 강에 풀어놓으면 사람 크기만큼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이 자신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머리는 좋지만 아직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노벨상을 타기까지 성장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만 바꾸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역사에 길이 남는 많은 인물들이 탄생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자녀라고 믿게 만드는 욕심만 버리면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 성모님을 어머니라 믿게 만들어야 역사를 바꿀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때 자녀는 더 큰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유태인들은 바다를 가를 생각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뗏목을 만들 생각만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 위를 걸을 생각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하느님임을 먼저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크기는 자기를 누구라고 믿는가의 크기입니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하느님이라 말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라 믿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엄마, 나 개지?”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일까요?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죄를 지었습니다.
만약 이미 하느님임을 믿었다면 하느님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죄는 오히려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 믿지 않는 데서 옵니다.
제가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 처음 책을 낼 때는 감히 대놓고 ‘당신은 하느님입니다.’라고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닥쳐올 반대가 두렵고 이해받지 못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개정판’은 솔직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썼습니다.
그랬더니 저도 속이 시원하고 읽으시는 분들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개정판이 나와서 여러분이 많이 읽으시고 전파해 달라고 또 홍보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수익금은 가난한 지역 아이들의 교육과 무료급식에 사용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오늘 복음말씀은 성전이 허물어진다는 예수님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하느님을 모셨다면 우리 모두는 성전입니다.
성전이 허물어지는 이유는 하느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신데,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유일한 진리는 당신을 모시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잃으면 심판 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각오하며 이 믿음을 지키고 전해야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 믿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양식이 되셨습니다.
성체는 하느님입니다.
밀떡 안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성체 안에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그 성체가 하느님이 되는 것이나, 그 하느님이 되신 성체가 인간 안에 들어와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매번 모시면서도 자신은 하느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자랑스럽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있어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고 그래야 하느님으로 새로 태어나는 걸음마라도 시작하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잃으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그러면 성전은 허물어집니다.
내가 하느님이라는 진리가 머물지 않는 집은 성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태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냈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으로 박해받을 때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봅시다.
그 곳에는 북극성이 있습니다.
그 북극성에는 “너는 내 자녀다.”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그분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