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다니엘 5,1-6,13-14.16-17.23-28
루카 21,12-19
< 지금 이 순간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북극성을 붙들라 >
일생에 단 한 번의 영화 출연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조연상과 특별상을 동시에 수상한 배우가 있습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의 주인공 ‘해럴드 러셀’입니다.
이 영화는 세계 제2차 대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이 집으로 돌아와 사회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러셀은 이 작품에서 전쟁 중에 두 손을 다 잃고 선원으로 일하는 상이군인 역을 맡았습니다.
원래 러셀은 배우 지망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수부대원으로 2차 대전에 참가했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은 실제 상이군인이었습니다.
두 팔을 잃었을 당시, 그는 ‘아,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하며 참혹한 절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아직은 잃은 것 보다 가진 것이 아직 더 많지 않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달려가 의수를 달고 자신의 인생 역정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이 세상에 알려지고 영화화 된 것이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의 장애인들, 특히 상이군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 공로로 특별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보고 그래도 밝은 면을 찾아보라는 말은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별들 중에서 지리를 이탈하지 않는 북극성이라는 하나의 별이 있듯이 다 잃어도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그 하나는 반드시 있습니다.
바다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라면 다른 별들이 아니라 북극성, 그 하나를 꼭 찾고 붙들어야합니다.
그 별이 아니라면 바다 위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소식이 너무 자주 들립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들도 북극성을 바라볼 줄 알았다면 그렇게 길을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허황된 가치들을 붙들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 수많은 별들 중에 어떤 별이 북극성인지 찾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헤밍웨이도 엽총으로 자살한 사람입니다.
그는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의 소설로 세계적 스타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3번씩이나 실패하였고, 그 이후에 좋은 소설이 나오지 않자 큰 심적인 혼란에 빠집니다.
노벨문학상까지 탄 그가 왜 자살을 선택해야 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말년에 쓴 ‘노인과 바다’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노인은 헤밍웨이 자신을 상징할 것입니다.
노인은 아주 큰 물고기와 며칠간 사투를 벌입니다.
죽을 고생을 해서 결국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노인은 엄청난 노력으로 큰 명성을 얻은 자기 자신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물고기를 배 옆에 묶어서 오는데 상어 떼들이 공격을 했습니다.
노인은 죽을 고생을 다해 상어 떼와 사투를 벌입니다.
그러나 부두에 도착했을 때는 물고기가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습니다.
노인은 쓰러져 잠이 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헤밍웨이도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합니다.
북극성처럼 변하지 않는 가치가 아닌 세상의 헛된 행복의 조건을 추구하면 이와 같은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위해 인내해야 할까요?
망망대해에서 인내를 가지고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북극성입니다.
북극성을 찾으면 이미 육지에 다다른 것처럼 당장 평화를 얻습니다.
그러나 북극성이 아닌 다른 움직이는 별들을 향해 항해한다면 제자리만 빙빙 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더욱 불안해집니다.
북극성을 찾았다는 증거는 ‘지금 당장의 감사와 행복한 감정’입니다.
오직 북극성 하나만이 정북향을 알려줍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그 별을 찾은 것만으로 평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별을 찾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흔들리는 가치들을 추구하며 살기 때문에
항상 불안합니다.
변하지 않으시는 분은 처음부터 계셨고 영원히 계실 하느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으로 세상 풍파 속에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