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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1-24 조회수 : 617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사무엘 하 5,1-3
콜로새 1,12-20
루카 23,35ㄴ-43 
 
< 감사하면 가족이고 감사하지 않으면 남남이다 > 

어떤 사람이 한 달 동안 아주 특이한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 실험이란 어떤 마을의 일정한 구역에 있는 각 집에 매일 100달러씩 아무런 조건 없이 나누어 준 다음 그 결과를 관찰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날 집집마다 들러서 현관에 100달러를 놓고 나오는 그를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인지 의아해 하면서도 멈칫멈칫 나와서 그 돈을 집어 갔습니다. 
 
둘째 날에도 거의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셋째 날, 넷째 날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돈을 직접 사용해 본 결과 진짜 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 동네는 날마다 100달러씩 선물로 주고 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두 번째 주쯤 되었을 때는 동네 사람들은 현관입구에까지 직접 나와 돈을 나눠주는 사람이 언제쯤 올 것인가 하고 평소에 그가 오던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또 이웃마을에까지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세 번째 주쯤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이상한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지 않게 되었습니다. 
 
넷째주가 되었을 때쯤은 매일 100달러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끼 밥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 같은 일상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드디어 실험기한이 끝나는 한 달의 맨 마지막 날에 그 실험을 계획했던 사람은 평소와는 달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지 않고 그냥 그 골목을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반응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문을 거칠게 열고 현관까지 나와서 성난 목소리로 “우리 돈은 어디 있습니까?”, 혹은 
“당신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왜 오늘은 내 돈 100달러를 안 주는 겁니까?”
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출처: ‘감사를 모르는 현대인’, bwkw0712님의 블로그]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만 원, 이만 원을 주다가 나중엔 수십만 원씩, 그 다음엔 수백만 원씩을 당연히 자신에게 주어야 하는 것처럼 청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만 원에 감사하다가 나중엔 수십만 원을 주어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으면 마치 저의 탓을 할 것 같은 말투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계속 가진 것을 내어주어야 할까요? 
아니면 관계를 조금 끊어보는 편이 나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응답은 만 원을 주어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돌아올 때까지는 조금 배고프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더 유익일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사람은 받다보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급기야 그것을 주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잊게 됩니다.
이런 일이 많이 발생하는 많은 경우가 자녀와 부모 사이입니다. 
기껏 키워놨더니 해 준 것이 뭐냐며 부모를 대상으로 보험금을 타먹으려 일부러 상해를 입히는 자녀들도 뉴스에 나옵니다. 
그런 자녀에게 부모는 돈이 있어도 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면 하느님은 우리를 보는 대신 아드님의 십자가를 보며 
죄가 다 보속되었음을 되새기십니다.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죽이셨으면 주님은 할 것은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청하며 안 들어주면 기분나빠하려는 자세를 갖는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기도는 절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내 안에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내가 상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가 드러납니다. 
무언가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사람은 그 청하는 대상에게 이전에 받은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상대를 이미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남남으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미리 남남으로 여기며 무엇을 청하니 그 청하는 것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청하는 사람이 부모라고 여기면 내가 지금 청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더라도 원망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다 받게 됩니다. 
 
오늘은 하느님을 대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의 대표적인 두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이 말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말일까요? 
메시아임을 십자가에서 이미 증명하고 있는데도 그는 자신을 구원해 주면 메시아로 인정하겠다고 빈정대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천만 원만 준다면 부모로 인정해주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죄수 하나는 위 사람을 꾸짖으며 이렇게 청합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왜 하느님이 두려울까요? 
이미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못해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셔야 할 것을 다 해주셨다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자체가 그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십자가에 달린 분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며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부모로, 혹은 좋은 임금으로 여기는 이들의 왕이 되어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마치 증명이라도 해보라는 듯이 이것저것 청하는 이들을 당신 백성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지내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일지 않는 이들에게 구원의 희망은 없습니다. 
그 사랑을 스스로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그분은 이제 우리의 믿음에 따라 심판하시는 ‘왕’으로 서 계실 것입니다. 
그동안 나에게 부족하게 해 주어서 그분을 임금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그분의 엄위 앞에서 통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분을 임금으로 미리 알아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부터 회복하도록 합시다.  
 
그 방법은 그분께서 나를 위해 해 주신 십자가를 묵상하면 됩니다. 
십자가 바라보며 감사가 안 나오면 내가 먼저 그분을 나와 아무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고 있음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반면 언제나 감사할 수 있다면 그분을 왕으로 영접한 
이미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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