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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1-22 조회수 : 621

11월 22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마카베오 상 4,36-37.52-59
루카 19,45-48 
 
< 효도하는 자녀가 행복하다 > 

영화 ‘똥파리’(2008)의 주인공은 용역소에서 일하는 깡패입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지만 가슴 한 편엔 온전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아픔이 시리도록 서려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무한한 증오심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칼에 찔린 여동생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는 장면을 볼 때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그의 가족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생의 죽음과 함께 그의 인간성도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아버지만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합니다.
그리고 14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를 한없이 두들겨 팹니다.  
 
그렇다고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가족을 잃은 아픔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 아버지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마음 안에서 그런 아버지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미워할 수 있는 가족이라도 있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김희아씨는 얼굴에 큰 모반이 있다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고아원에서 자라고 다른 쪽 얼굴엔 암이 들어 뼈까지 다 깎아내어 얼굴 모양까지 변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녀를 보면 사랑은 노력하면 발견해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래도 자신을 뱃속에서 키워주시고 아픔을 감수하며 낳아주시고 다른 곳이 아닌 고아원에 버려주신 것을 감사해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감사하려고 해도 그런 감사할 거리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면 그녀는 똥파리의 주인공처럼 영혼 없는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내가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면 부모님은 나의 생명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 피 흘림을 묵상하면 자신을 버린 부모에게도 감사가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모에게서 감사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증오하여 자신 맘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부모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행복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 감사를 찾아내고 못 찾아내고는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묵상하거나 그러기를 원치 않는 두 부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상 이 지상의 부모가 자녀에게 생명을 준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겐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상의 부모는 그 생명을 전해주어 창조에 협조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어떠한 감정을 회복해야 할까요?
‘감사’입니다.
감사는 김희아씨처럼 노력해서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감사 없이 불평만 하며 영혼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해
당신에게 감사할 위대한 표징을 주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피 흘림을 묵상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 내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당신을 묵상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감사가 솟지 않기 때문에 우리 마음 안에서 그 감사를 이끌어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이들이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마음에 감사가 솟아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감사가 솟아나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면 자녀는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원치 않은 그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방해하는 예수님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자신들을 꾸짖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느님 사랑에 불을 지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려 하지 않는 강도들의 소굴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 사랑이 기도하는 집인 사람들에게 감사가 솟구치게 만들었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예수님의 희생을 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기 뜻대로 사는 것보다 감사하여 그분 뜻대로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묵상하는 기도하는 집이 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도들의 소굴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닌 기도하는 집이 된 이들만을 당신 가족으로 여겨주십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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