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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1-17 조회수 : 704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 
 
말라키 3,19-20ㄴ
테살로니카 2서 3,7-12
루카 21,5-19 
 
<​ 미움 받을 용기는 미워하지 않을 용기에서 나온다 >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의 남서쪽에 리틀턴이라는 지역에 있는 콜롬비아인 고등학교에서 학생 25명과 용의자 2명이 총기 난사 속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 가운데 살아남은 여학생이 증언한 놀라운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이 학교의 불량 서클 단원이었던 ‘트렌치 코트’ 마피아 단원 둘이 총기를 가지고 들어와서 학생들을 난사하고 있었을 때, 그곳에는 17살 된 캐시 버넬이라는 소녀도 있었습니다. 
 
총을 들고 있던 학생 하나가 그녀에게 총구를 목에 겨누고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하느님 믿어?” 
 
만약 하느님을 안 믿는다고 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그녀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나는 하느님을 믿어.”(Yes, I believe in God). 
 
그러자 그는 총구를 캐시의 가슴에 겨누고는 마구 총을 쏘았습니다.
캐시의 이야기가 알려지기 시작하자 미국 크리스천 십대들 사이에서 “Yes, I believe in God”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고, 플로리다 주의 한 도시에서는 2천 5백 명의 십대들이 모여 감동적인 신앙고백의 집회를 가졌습니다.  
 
이 집회의 이름 역시 “Yes, I believe in God”이었습니다. 
이 집회는 마약 속에 찌들어 죽어가던 미국 그리스도인 십대들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운동으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때 목숨이 아깝다고, 미움 받는 것이 두렵다고 믿음을 부인하면 몸은 살아도 영혼은 죽습니다. 
하느님께서 믿음과 함께 사라지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미움을 감수할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을 하시는데 이는 비단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말씀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을 믿었다가 예루살렘처럼 폐허가 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예루살렘의 그 자랑스럽던 성전은 서기 70년에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까지도 재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가난해지고 박해받고 미움 받는 죽음이었습니다. 
현세적 행복을 추구하던 그들은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추구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 폐망의 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그런 종말을 맞지 말라고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미움 받을 용기가 없다면 박해를 이겨낼 수 없고 
박해를 이겨낼 수 없다면 자신 안의 하느님의 존재를 증언하지 못합니다.  
 
성전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장소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증언하지 못하는 성전은 참 성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는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움 받을 용기가 있어야 하느님을 모실 수 있고 그래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도 생깁니다. 
미움 받을 용기가 있어서 관계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오히려 관계가 집착이 아니라 더 친밀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술을 적정선에서 그만 마시겠다고 끊을 수 있는 사람이 술을 더 즐길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술을 끊을 용기가 없을 때 그것은 관계가 아니라 집착이 되고 중독이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진짜 망가지게 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끊고 미움 받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더 건전하고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움 받을 용기를 지닐 수 있을까요? 
미움은 나의 고통의 탓을 상대에게 돌리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의 탓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를 당신의 탓으로 여기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까지 당신 탓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미 다른 사람을 미워할 마음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떠한 해를 끼쳐도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사랑할 용기가 있어야 미움 받을 용기도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미워하려는 사람을 미워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 미움 받을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기 위해 미움 받을 용기를 포기하게 되면 정말 미운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미워하지 않을 용기를 얻으려면 모든 것이 나의 탓이라 할 줄 알아야합니다.
어떤 신부님이 피정 때 신자들에게 들려준 자신의 체험입니다. 
 
“지난 11월이었습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피정지도 할 때) 미사를 마치고 기도하고 있는데, 어떤 영감이 왔습니다. 
당시 우간다에 있었던 어느 신부님께 전화를 드리라는 아주 엉뚱한 생각이었습니다. 
처음에 너무 엉뚱해서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영감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지요. 
제가 전화를 한 그 순간에 신부님은 아주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숲 속에서 차가 서버렸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크게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2006년에 강도를 만나 죽을 뻔한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당시 4명의 강도가 권총을 빼어 저를 위협했었습니다. 
 
그 신부님이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 시동은 걸리는데 차가 움직이지 않아요.’ 
저는 보닛을 열게 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안에 있는 줄이 하나 끊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연결해 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차에 대해 아는 사람에게는 간단한 일이지만 차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게는 
엄청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우간다에 있는 차를 1분 만에 고쳐주었습니다. 
저는 차 수리공입니다. 
자격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신부님의 행복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도구일 뿐입니다.”
[출처: ‘아주 특별한 순간’, 안토니오 사지 신부, 바오로 딸]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쓰시려고 하는데 내가 기도를 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도구로 쓰실 수 있을까요? 
만약 내가 하느님의 온전한 도구가 되었다면 어쩌면 굶어 죽는 사람도 없고 환경이 이처럼 파괴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유럽에 있는 어떤 아이는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전 세계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마더 데레사와 같은 수녀님을 통해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십니다.
그러니 세상에 죄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느님의 온전한 도구가 되지 못한 탓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미움 받아도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자비만을 의탁해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제 탓입니다. 용서하세요.”만 모든 이들에게 할 수 있어도 충분히 미움 받을 용기가 생깁니다.  
 
미움 받을 용기가 생기려면 먼저 미워하지 않으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워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려야합니다. 
남 탓을 하면서 미움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용기를 가집시다. 
그러면 미움 받을 용기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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