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지혜서 2,23―3,9
루카 17,7-10
< 믿음이 있다면 용서할 필요가 없다 >
어떤 신부님이 자기 교구의 교인 한 명이 특별한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서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정말 그런 은혜를 받았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 신부는 과거에 신학교 시절에 저지른 어떤 죄로 항상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정말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는 물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젊은 날에 죄지은 일로 늘 마음이 괴로운데, 내가 무슨 죄를 범했는지 하느님 앞에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그는 기도해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에 신부가 다시 그를 만났습니다.
“기도해 보셨습니까?”
그가 물론 기도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제가 옛날에 어떤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 신자가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잊어버리셨답니다. 신부님.”
죄책감은 다른 이를 판단하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에 그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서로의 탓으로 판단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먼저 이웃을 판단하게 만드는 나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합니다.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우리 죄가 사해졌음을 ‘믿어야’합니다.
내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이웃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그러면 용서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되지 않습니다.
설혹 용서가 된다고 해도 미워할 또 다른 사람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라는 주제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용서해달라고 하면 매번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믿음만이 용서의 힘임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오늘의 비유말씀을 해주십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돌아온 종은 비록 힘이 들지라도 돌아와서 주인의 식사시중까지 들어야합니다.
그런 다음 먹고 마시게 되어있습니다.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그런 모든 분부를 다 수행하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믿음이 없는 종은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주인의 몫이지 종의 몫이 아닙니다.
종이 잘해서가 아니라 주인이 뽑아 주었기 때문에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종으로써 할 일을 다 하고 나서도 항상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구원이 나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임을 믿는다면 순종하면서도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스페인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용서해 주셨음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뿐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이유는 믿음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 구원이 우리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임을 알게 하기에 겸손하게 합니다.
겸손하다면 자신이 은총으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알기에 이웃을 판단할 수 없어집니다.
믿음이 생기면 겸손해지고 겸손해지면 용서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아니 누구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용서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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