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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1-11 조회수 : 560

11월 11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지혜서 1,1-7
루카 17,1-6

< 용서만이 죄를 없애는 힘이다 > 

박보영 목사는 길거리 아이들을 데려다 키워준 훌륭한 분입니다.
목사님이 길거리 아이들을 거두어들일 때 그들이 입던 옷을 버리지 않고 비닐봉지에 잘 보관한다고 합니다.  
 
이발하고 씻기고 새 옷을 입히면 아이들은 완전히 새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규칙적인 기도와 공부, 그리고 단체생활은 다시 옛날의 자유로운 길거리 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조금씩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할 때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예전 옷을 한 번만 입어보라고 건네집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냄새가 밴 그 옷을 집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입혀봅니다.
그리고 그들보고 가지고 나가서 태우라고 합니다.
그 옷을 태우고 온 아이들은 몇 번이고 샤워를 하면서 몸을 씻는다고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죄가 없어졌을 때의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없애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계속 죄인의 냄새를 풍기게 해야 할까요,
아니면 깨끗해졌을 때의 행복을 느끼게 해야 할까요?  
 
죄 없을 때의 행복을 느끼면 다시는 죄로 돌아가는 일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 오물 냄새로 가득 찬 옷을 다시 입을 수 있겠습니까.
질책과 용서 중, 죄를 용서하는 힘은 용서에서 나옵니다. 
 
질책은 매서운 바람과 같아서 옷깃을 여미게 만듭니다.
더욱 반발심이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듯한 용서만이 무거운 코트를 벗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쓰시는 방법이 용서이고 사탄이 쓰는 방법이 질책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은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 가죽의 주인은 당신 아들 예수님입니다.
아드님의 껍질을 벗겨 우리를 입혀주시며 우리가 더 이상 죄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믿고 당신 몸을 십자가에 기꺼이 우리 죄를 위해 봉헌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믿고 더 이상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렇게 죄에서 벗어납니다. 
 
반면 사탄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목소리로 부르실 때 나무 뒤로 숨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죄를 감추기 위해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는 수고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죄가 없어진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나무에게 피해를 입히는 아무 쓸모없는 행위만 했던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짓는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려주어야 하는 것은 그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하셨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죄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 일이 없어집니다.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남을 판단하는 일도 없어지고 어차피 죄를 지었으니 다른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없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 앞에서 그녀의 죄를 들추어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죄책감을 조장하는 바리사이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죄 때문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고 하시며 오직 용서만이 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자비만이 죄를 이깁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남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들이 용서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꼬집으십니다.  
 
그들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며 남을 죄짓게 하지 않으려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꾸짖으라는 말은 질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죄를 계속 지으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알려주는 예언자직을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질책은 상대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불편하여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게 해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용서를 통해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이 되어야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셨음을 믿어야합니다.
이것이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생명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성체성혈을 상징합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을 때에만 그분의 힘으로 용서가 가능하고 그러면 세상의 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 받은 사람만이 용서로써 이웃의 죄가 사해짐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웃을 죄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용서만이 다시 옛 죄를 입지 못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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