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집회서 35,15ㄴ-17.20-22ㄴ
티모테오 2서 4,6-8.16-18
루카 18,9-14
< ‘내 탓이오!’가 죽으면 ‘관계’도 죽는다 >
한 마을에 그것도 서로 옆집에 너무도 다르게 살고 있는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오손도손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비해 그 옆집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식구끼리 매일 다투고 살았습니다.
하루는 매일 다투다 못해서 옆집에 다정하게 사는 가정을 좀 본받기 위해
온 가족이 그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저희는 가족끼리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다투는데 어떻게 하면 이 집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희는 다툴 일이 없던데요?”
마침 행복한 집의 딸이 방문 온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과일을 담을 접시를 꺼내다가 그만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그만 조심하지 못하고.”
옆에 있던 엄마가 같이 유리조각을 주워 담으며 말했습니다.
“아니다. 엄마가 하필이면 그런 곳에 접시를 두었구나.”
엄마의 말을 듣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니오. 내가 아까 보니까 접시를 둔 모양이 위태해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도 바로 두지를 못했소. 미안하오.”
그 집을 방문했던 가족들은 그 집 식구들의 대화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내 탓이오!”입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싶어도 먼저 내 탓을 하지 않으면 판단이 일고 그러면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은 ‘내 탓이오’를 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두 부류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 최후의 심판 때에 양과 염소로 나누어 양은 천국에 가고 염소는 지옥으로 가듯, 인간은 대인관계를 잘 맺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심판받아 각자에 합당한 곳에서 영원히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바리사이는 철저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며 누가 봐도 올곧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통해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내 탓이오.’가 나올 수 없습니다. ‘내 탓이오‘가 안 나오면 이웃에 대한 판단만이 나옵니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가 아니라 관계를 잘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입니다.
바리사이는 죄인들을 심판하고 있으므로 관계를 잘 못 맺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이 지은 죄가 서로 다른 사람의 탓이라고 말하던 것과 같습니다.
남의 탓을 하며 좋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반면 세리는 자신이 죄인인 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만을 청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말은 “저는 죄인입니다. 다 저의 탓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담이 하느님 앞에서 숨지 않고 이렇게 죄를 자신의 탓으로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더라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이렇게 핑계를 대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창세 3,12)
이 말 안에는 자신이 죄를 지은 탓이 하느님과 여자에게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천국에서 쫓겨나는 이유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과일 몇 개로 인간을 호적에서 파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이 쫓겨난 이유는 관계 맺는 법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제 탓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 말을 잊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탓이 아니면 반드시 남의 탓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관계는 끝입니다.
‘호오포노포노’의 휴렌 박사는
“제 탓입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만을 외워서 정신병동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치유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가 있었던 하와이 정신병원에는 지나친 폭력성을 드러내는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의사도 그 병원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잘못이 있기에 이런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상태인 이유에 자기 자신도 포함시킨 것입니다.
그는 그 사람들의 정신병들에 분명 자신의 탓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형제 중 하나가 잘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그 형제만이 아니라 그 형제의 형제들, 부모, 친족의 영향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아이가 굶어죽어 간다면 지나치게 돈만 알고 사는 나의 탓도 분명 있는 것입니다.
큰 태풍이 발생해도 내가 세상 온난화에 영향을 준 원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어떤 죄에서도 내 책임이 없다고 발뺌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를 당신 탓으로 여겨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모든 죄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용서를 청할 줄 알아야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휴렌 박사는 환자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차트를 하나하나 보며 그저 “제 탓입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웠습니다.
그랬더니 병원은 더 이상 운영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환자들이 순해졌고 치료에 적극적으로 응해서 대부분이 다 퇴원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죄가 존재하는 것은 정말 나의 탓입니다.
나의 아내가 가끔 딴 사람이 된 것처럼 화를 내는 것도,
나의 남편이 지나치게 친구들과 어울려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도, 나의 자녀들이 컴퓨터 게임만 하는 것도 다 나의 탓입니다.
먼저 나의 탓을 함으로써 내 자아를 정화시켜야 꽉 막혔던 나를 통해 은총이 그들에게로 흘러갑니다.
그러면 그들도 좋아집니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면 세상은 분명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탓만 하지 말고 나의 탓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죄를 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에서 벗어나 의인이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죄인은 항상 나의 탓을 하며 용서를 청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절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당에서만 하지 말고 항상 “제 탓입니다. 용서하세요.”를 반복합시다.
가능하다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도 자주 기도하면 좋습니다.
이것이 하와이 전통 신앙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합니다.
아담이 자신이 지은 죄가 자신의 탓이고 하와가 지은 죄도 자신의 탓이기에 용서를 청했다면 죄는 거기에서 머물렀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감사했다면 선악과를 따먹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했다면 뱀과 대화하며 한눈팔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자주 “제 탓입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웁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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