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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0-07 조회수 : 560

10월 7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요나 1,1―2,1.11
루카 10,25-37 
 
< 인간은 어차피 휘둘리는 존재다 > 

축음기 영사기 전구 등 무려 1천3백건이 넘는 발명품을 내놓은 에디슨(1847~1931)도 생애의 말년에는 특유의 외고집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는 “몸은 머리를 여기 저기 옮겨주는 데만 필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70세가 넘어서도 잠자는 시간이 하루 4시간에서 5시간으로 늘었을 뿐 여전히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축음기 회사에 과도한 애착을 느낀 나머지 라디오방송이나 전기식 레코드플레이어의 시장성을 무시한 것이 그의 실책이었습니다.  
 
에디슨은 “사람들은 라디오 방송국이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에 곧 싫증내고
우리 회사의 축음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세 아들이 아버지를 설득하다 끝내 고집을 꺾지 않자 몰래 전기식 레코드플레이어 제조에 나섰다가 에디슨의 격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70대 후반이 돼서야 에디슨은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축음기 생산을 그만두고 라디오 제조에 나섰으나 2년 후 2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공장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80세가 되자 에디슨은 이번에는 고무 제조에 호기심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내에 자생하는 식물들에서 고무성분을 추출하는 일이었습니다.  
 
에디슨의 부인은 회고하기를 “그는 고무 생각만 하고 고무 이야기만 하고 고무 꿈을 꾸었다.”고 했으며 “미국은 5년 내에 고무생산국이 된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고무는 천연 고무에 비해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무엇보다도 질이 형편없었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 없이 노년을 보내던 에디슨은 결국1931년 10월 18일 향년 84세로 눈을 감았습니다. 
 
유튜브에서 요즘 조회수가 굉장히 높은 것들의 제목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나답게 사는 게 정답이다”,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법”,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등의 제목이었습니다.  
 
나의 인생을 영화라 생각하면 내가 주인공도 되고 감독도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하는 이유는 나답지 않으면 타인이 원하는 대로 휘둘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휘둘리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믿어버리면 자기 자신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에디슨의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모습이 꼭 옳아 보이지 않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신을 믿으라. 자기의 주인은 자기라는 말을 절대 믿지 마십시오.
어떤 피조물도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할 수 없습니다. 
 
사탄교의 경전의 제1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탄을 숭배하라.”가 아닙니다.
“네 뜻대로 하라.”입니다.
내 뜻대로 하면 사탄이 됩니다. 내 자아가 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되려고 하면 누구도 그 사람의 고집을 흔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 자기 생각에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바람에 흔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적어도 율법학자는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아니라 창조자에 의해 지배당해야 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인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율법은 안다고 지켜지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묶여있는 율법학자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물을 때 드디어 신약으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지 찾지 말고 내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사랑을 계명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을 ‘소명’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소명은 의무입니다.  
 
사랑은 나의 주체로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시키니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지배당하고 사랑에 흔들려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람은 자아에 휘둘리던지, 외부의 것들에 휘둘리던지, 창조자에 의해 휘둘리던지 셋 중의 하나를 선택합니다.  
 
나에 휘둘리면 모든 행위의 주체는 내가 되고 내가 하는 게 옳은 것이 됩니다.
그러다가는 고집불통이 되고 나중엔 사탄이 됩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휘둘리면 자신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역시 사탄이 됩니다.  
 
반면 하느님에 의해 휘둘리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소명을 받습니다.
사랑하기 싫어도 사랑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됩니다. 
 
사람은 들에 핀 꽃처럼 어차피 흔들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흔들리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에 우리 몸을 맡깁시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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