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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0-05 조회수 : 509

10월 5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바룩 4,5-12.27-29
루카 10,17-24 
 
<​ 업적지향적 삶과 의미지향적 삶 > 
 
어떤 아이에게 손가락을 빠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손가락을 빨지 말라고 타이르거나 혼내도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쳐버린 아버지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매일 15분씩 열심히 손가락을 빨아라. 그럼 아빠가 100원 줄게.”
얼마 후 아이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아빠, 나 이제 손가락 빨기 싫어요!”
또 이런 실험도 있습니다.  
 
심리학자 그린과 스턴버그는 초등학교 4, 5학년 어린이들에게 새로 개발된 재밌는 수학게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점점 재미를 붙여 틈만 나면 게임을 즐겼습니다.  
 
10일 뒤쯤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재밌지? 지금부터 오래 하는 사람에겐 트로피와 상을 주기로 하마.” 
 
처음엔 아이들이 앞 다투어 더 오래 게임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신나서 하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경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트로피와 상을 주지 않겠다고 하자 아이들은 게임을 더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참조: ‘리듬: 내 안의 부정적 생각 싹 날려버리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어떤 것에 대한 노력을 멈추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힘이 드는 것에 비해 결과가 미약할 때 노력을 멈추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것에 대해 경쟁을 지나치게 많이 하게 되면 에너지가 소진되어 포기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만든 사람에게 보복을 하게 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힘의 경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경쟁에서 이겨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경쟁상대로 생각하여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이런 일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이 벌어집니다. 
봉사자들이 본당 사제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경쟁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당 신부님이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인정해주는 것 같으면 그 다른 사람도 미워하고 본당 신부도 미워합니다. 
너무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분들은 대부분 이런 함정에 빠지고 지옥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경쟁에서 누구보다 앞선다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 지옥체험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흔두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각자 자신이 한 일들을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사실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성령의 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선교에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라고 하시며 그들이 잘 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임을 일깨워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녀서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것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선교를 통하여 옵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직행버스입니다. 
그냥 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여 기쁘게 하려면 더 많은 선교를 하는 사람, 더 멋진 성당을 짓는 사제, 더 존경받는 신앙인이 되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 일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업적주의자로 전락해버립니다. 
결국 이도저도 되는 일 없이 지옥의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는 일의 성패와 상관없이 그 일 자체가 가치가 있어서 행복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시선의 차이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뉩니다. 
업적, 혹은 목적지향적 인간과 의미지향적 인간입니다. 
그 일을 통해 목적에 다다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일 자체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는 일 자체에 의미를 두고 성패는 상관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자매님이 참으로 마음이 찡하다고 하며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함께 묵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여름 우리의 눈을 기쁘게 하는 형형색색의 꽃들은 가지가 성장을 멈췄다는 증거다.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기만 하면 풍성한 꽃도, 꽃이 진 자리에 달리는 튼실한 열매도 볼 수 없다.  
 
내처 자라기만 하면 하늘에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뿌리로부터 점점 멀어져 결국 에너지가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스스로 멈춰야 할 때를 잘 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성장했고, 욕심을 내면 조금 더 클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나무들은 자라기를 멈춘다.  
 
마치 동맹을 맺듯 ‘나도 그만 자랄 테니 너도 그만 자라렴.’ 하고 함께 성장을 멈추고는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결국 나무에게 있어 멈춤은 자신을 위한 약속이면서 동시에 주변 나무들과 맺는 
공존의 계약인 셈이다.” 
[출처: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우종영, 메이븐] 
 
하늘로 오르려고만 하면 땅이 주는 에너지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고 하면 저절로 높이 올라갑니다.  
 
목적지향적 삶은 그래서 힘이 빠지고 고통스럽습니다. 
반면 의미지향적 삶은 항상 현재 하는 일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기쁘고 평화롭습니다.  
 
업적은 사라지지만 의미는 영원히 남습니다. 
의미지향적 삶을 사는 사람의 결과도 그래서 의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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