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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9-15 조회수 : 527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탈출기 32,7-11.13-14
티모테오 1서 1,12-17
루카 15,1-32 
 
<​ 하느님 마음의 크기 > 

추석명절이라 본가에 가서 옛날 자라던 고향마을을 좀 걸었습니다. 
고향마을은 사실 미군부대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냥 그 동네가 보이는 둑방길을 걸은 것입니다.  
 
둑길은 사람들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냇가 주변에는 떠내려 온 쓰레기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앉아서 쉬라고 만들어놓은 벤치 주위에도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과 플라스틱 커피 잔과 같은 쓰레기들이 여기저거 버려져 있었습니다. 
쓰레기통이 없어서 그냥 버린 것 같아보였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선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음식 쓰레기는 주울 수 없었지만 다른 것들은 비닐봉지에 담아 차에 싣고 집 가까이 와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손도 지저분해지고 차에 냄새나는 것들을 실어서 좀 그렇기는 했지만 착한 일을 했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전에 같으면 절대 줍지 않았을 쓰레기들을 어떻게 줍게 됐지?’ 
 
그래도 어릴 때 살았던 고향이라고 남들보다는 더 내 집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버린 사람들은 아마 내 집이 아니라 버려도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자신의 방에다 음식 쓰레기나 커피가 흐르는 종이컵들을 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내 마음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안에 있으면 나처럼 사랑합니다. 
소중히 다루고 깨끗하게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 밖에 있으면 나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더럽히는 행위도 스스럼없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각은 그들을 바라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시각과는 매우 다릅니다.  
 
자신들이 아니라 세리들과 죄인들을 더 좋아하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을 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세리나 죄인들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고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경쟁자로 봅니다. 
 
예수님은 그들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탕자 아들을 첫째 아들과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당신 마음 안에는 두 아들이 다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아들이 없습니다.  
 
반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과 둘째를 좀 구별해주기를 원합니다.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아버지에게 불만을 갖고 동생을 미워합니다. 
 
이런 면에서 마음은 집과 같은 것 같습니다. 나의 마음의 크기가 내 집의 크기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의 크기는 온 우주를 포함합니다. 
아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아들처럼 사랑합니다. 모든 인간이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의 마음은 자기 자신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입니다. 
동생도 아버지도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집 밖으로 쓰레기를 마구 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마음이 아버지처럼 넓었다면 동생이 돌아온 것에 대해 아버지와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가장 큰 죄인이라도 나 자신처럼 받아들이게 될 때 하느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하느님 마음의 크기는 벌레 하나의 목숨도 소중하리만큼 온 우주를 다 포함하실 것입니다. 
심지어 지옥에 있는 사탄과 악마의 무리까지도 포함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당신 집에 살게 하실 분이십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이 자신 외에는 어떤 것도 품을 수 없게 작아지고 굳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나뿐인 인간, 줄이면 나쁜 인간입니다. 
 
하느님 마음을 알게 되면 또한 나의 마음도 넓어집니다. 
어떤 수녀님은 중학교 사춘기 때 청소부와 결혼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변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는데, 청소부 아저씨가 매일 같은 시간에 청소하는 모습이 참으로 믿음직했던 것입니다.  
 
청소부와 결혼은 못하더라도 청소부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장래 희망사항에 ‘청소부!’라고 썼다가 선생님이 어머니를 모셔오라고까지 했습니다.  
 
수녀님은 그럴 것까지 있느냐며 그냥 ‘교사’라 바꾸어서 썼지만 
마음은 언제나 청소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수녀원으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시킨 일이 청소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밖을 청소할 때 ‘하느님은 내 소원을 잊지 않고 들어주시는 분이구나!’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던 꿈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꿈도 수녀가 되게 하심으로써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청소할 때 매우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그분이 사랑하는 것까지 사랑하게 됩니다. 
그분의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젠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청소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아흔 아홉 마리만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이 다다르는 곳의 모든 생명들을 당신처럼 아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은 잃어버린 은전 한 닢도 아홉 개의 은전이 있다고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은전 한 닢도 당신 자녀를 잃은 것처럼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잃어버리는 영혼들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훼손되는 지구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우리도 상상만이라도 내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의 마음처럼 넓혀봅시다. 
그러면 지구도 살고 미세 플라스틱 없는 물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좁아지면 그만큼 밖에 있는 것들에게 피해를 주고 그 피해는 또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하느님처럼 마음을 넓히면 모두에게 잘 해 주게 되고 또 그대로 돌려받습니다.  
 
사랑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먼저 어떤 누구도, 어떤 자연의 생명체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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